경건한 유대인들은 지금도 치즈버거를 먹지 않습니다.
고기와 유제품을 함께 먹지 않는 유대교의 전통 때문입니다.
그 전통은 출애굽기 23장의 마지막 문장,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출23:19)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참 이상한 명령입니다.
왜 하필 염소일까요. 왜 하필 ‘어미의’ 젖일까요.
이 명령이 염소 새끼를 특별히 불쌍히 여기라는 말씀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이유로 어미의 젖으로 염소를 삶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이 아리송한 명령은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의 연장으로서
안식년과 세 절기를 명령하시는 중 결론부에서 등장합니다.
안식년이란 일곱째 해에 추수를 멈추고 다음 해를 위한 파종도 멈추게 하신 명령입니다.
안식년의 진짜 목적은 구제였습니다.
안식년에 난 것은 가난한 자들로 먹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나그네들이 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연약한 이들을 살아가게 하시는 방편으로써 하나님은 땅에 대한 경작권을 칠 년째엔 내려놓게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일곱째 해에 씨를 뿌리지 않았으니 여덟째 해가 되어도 거둘 곡식이 없습니다.
그 말은 만으로 2년, 햇수로 3년간 수확이 없을 것을 각오해야만 안식년을 지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섯째 해에 삼 년 동안 먹기에 족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레25:20-22).
그러나 훗날 가나안 땅에 입성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후 안식년을 온전히 지켜본 적이 없었습니다.
안식년의 시간은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는 이들에겐 지킬 수 없는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절기에 대한 명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무교절과 맥추절, 수장절, 일 년에 세 번 모든 남자들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제사하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이때가 모두 하필이면 곳간을 가득 채우는 수확기라는 점입니다.
절기를 지키려면 곡식이 가득한 창고와 집을 비워야 합니다.
약탈을 목적으로 다른 나라가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누가 그 땅을 지킬 수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절기를 지키면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출 34:24).
그러나 훗날 가나안땅에 입성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연하다는 듯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절기들을 온전히 지켜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풍요를 잃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손을 놓지 못하자, 하나님은 강제로 그들 손을 놓게 하셨습니다.
490여 년간 그렇게 지키지 않은 안식년들이 쌓여 칠십 년이 되었고,
그들은 결국 포로가 되어 땅을 비우게 되었습니다(대하 36:21).
이렇듯 안식년과 절기는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한 가지 질문에 도달하게 합니다.
‘내가 손을 놓아도 하나님이 나를 먹이시고 지키실 것을 믿는가.’
이 이야기의 결론 자리에서 어미젖에 삶아진 염소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젖’이라는 단어는 ‘기름’이라는 단어와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젖'(할라브)과 ‘기름'(헬레브)은 같은 철자를 사용하는 동형이의어입니다.
단어가 가진 의미 또한 많이 닮았으나, 그 의미가 향하는 방향은 정반대인 단어들입니다.
기름은 먹고 남은 것이 몸 안에 쌓인 것, 즉 안으로 저장되는 풍요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젖은 밖으로 흘러가는 풍요입니다.
어미의 생명에서 흘러넘쳐 새끼를 살리는 풍요로움입니다.
그러니 젖으로 새끼를 삶는다는 것은, 젖이 원래 해야 할 목적을 배신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살리라고 주신 것으로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이 명령이 하나님께서 염소들을 염려하신 당부의 말씀이 아니라면(고전 9:9),
어미의 젖으로 염소를 삶지 말라는 말씀은
생명을 살리라고 주신 것으로 생명을 죽이는 일을 벌이지 말라는 말씀을 담은 비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풍요도 그렇습니다.
풍요는 가난한 사람을 먹여야 합니다.
나그네가 숨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출23:11,12).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또 다른 생명을 향해 흘러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맡기시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풍요를 움켜쥐기 위해 언약의 명령을 버린 백성들의 심리는 두려움입니다.
그것도 그냥 두려움이 아닌 탐심을 이루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들을 움켜쥐려 할수록,
살리라고 주신 그 풍요는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솥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귀한 것을 쌓아 두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흘려보내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셨습니다”(롬8:32).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젖줄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크게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결코 막연함에 기댄 불확실한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확실한 실체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우리에게 확실한 약속의 보증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랑을 믿는 사람마다
나그네와 같은 이들을 살리는 일에 우리의 풍성함이 흘러가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 삶을, 생명을 살리는 은혜의 젖줄로 살아가게 하실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