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편은 히브리어의 알파벳 순서에 맞춰 지어진 노래입니다.
‘알렙’, ‘베트’, ‘김멜’ 순으로 이어지는 독특한 문예적 규칙 때문에 눈에 확 띄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네 번째 자리에 와야 할 ‘달렛’ 파트가 없다는 점입니다.
‘김멜’에서 곧장 ‘헤’로 건너뜁니다.
만약 영어로 된 알파벳 노래에서 A, B, C 다음에 E가 나온다면 그것이 과연 실수일수 있을까요?
더군다나 이 시의 표제어는 “다윗의 시”입니다.
저자가 ‘달렛’으로 시작하는 자신의 이름을 맨 앞에 적어 두고선,
정작 노래 안에서는 자기 이름의 첫 글자를 빠뜨린 것입니다.
달렛이 빠진 자리를 보면 이 누락의 의도성이 더욱 짙게 느껴집니다.
바로 앞 절은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5절)이고,
바로 뒷 절은 “기억할 수 없나이다”(6절)입니다.
지우셨다는 말과 기억할 수 없다는 말 사이에서 글자 하나가 보란 듯이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악인의 이름을 지우신다고 노래하는 한가운데에,
마치 정말 그렇게 지워진 이름마냥 글자가 누락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에는 ‘달렛’으로 시작하는 단어들이 아예 없는 것인가 하면, 그건 또 그렇지 않습니다.
“주를 찾는 자들”의 ‘찾다’가 ‘달렛’으로 시작하는 ‘다라쉬’이고,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의 ‘심문하다’도 사실은 찾는다는 뜻의 ‘다라쉬’입니다.
빠진 글자의 원래 의미를 찾고 있는 우리처럼, 이 시의 하나님도 무엇인가를 찾고 계십니다.
바로 ‘피 흘림’입니다.
하나님은 피 흘림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피’ 역시 ‘달렛’으로 시작하는 히브리어 ‘다밈’입니다.
누락된 글자대신 주어진 것은 바로 하나님은 ‘피’를 ‘찾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시9편은 그분이 영원히 보좌에 앉아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신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기에 피를 흘리게 한 악인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의로움,
그 바름을 기준으로 삼아 바르지 않은 것을 바로잡으시는 정의 실현의 방법이 바로 지워내심입니다.
홍수에서도, 아말렉에게도, 그리고 이 시의 악인들에게도,
하나님은 그들을 끝내 지워버리시는 방법으로 심판하십니다.
이것이 공의로써 정의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이처럼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으리라 자신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편 143:2)고 고백했던 다윗도
자신이 지워져야 할 죄인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 역시 우리야의 피를 흘린 죄인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그는 ‘악인을 지워버리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는 대목에서
차마 자기 이름의 첫 글자로 시작하는 시구를  떳떳하게 노랫말로 적을 수 없었던 것일 지도 모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로 인한 수치를 아는 사람의 염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는 이후 전혀 뜻밖의 내용을 노래하는 것으로 흘러갑니다.
성경에서 분명 의인은 단 한사람도 없다고 단언하는데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악인을 삭제하시는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시고 마지막까지 영원히 기억하시는 부류의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사람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일까요?!
놀라운 것은 그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사람들은 의로운 자들이 아니라, 바로 가난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시는 노래합니다.
그러나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름을 기준으로 심판하시는 분이 어떻게 의로움이 아닌 가난함을 보고 기억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지워진 달렛 대신 남겨진 말들 속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피를 찾으시는 분입니다.
흘린 피를 결코 지나치지 않으시고 반드시 그 값을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에게서 그 핏값을 찾으시는 대신,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을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심판의 기준을 바꾸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자기 죄악을 지워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악인의 이름을 지우신다는 시편 9편의 ‘지우다’와 같은 <마하>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이름을 지워버리시는 대신, 그리스도의 피로 그의 죄악을 지워주셨습니다.
죄인이라는 이름에서 죄를 지워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셨기에 우리의 죄가 지워지고,
그가 끊어지셨기에 우리의 이름이 잊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억되는 가난한 자란 단순히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내세울 의가 없음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신의 빈곤함을 알기에 수치를 알고 염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가난함을 아는 사람은 바리새인처럼 의로운 체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손가락질하며 자신이 더 의롭다고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 역시 지워져야 할 죄인이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절망만이 진정한 소망을 얻게 합니다.
다윗은 자기 이름을 내세울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염치를 아는 가난함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를 지우시는 대신 그의 죄를 지우시고,
그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기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 믿으세요.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셨다는 증거로서 우리의 빈곤을 깨닫게 하시고
수치와 염치를 가르치실 거예요.
우릴 기억하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