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는 참 흥미로운 책입니다.
성경 66권 중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할 만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이 무엇인지, 그 의지를 어떻게 실현해 나가시는지, 역사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
죄란 무엇인지, 악한 인간을 어떻게 구원해 나가실 것인지를 설명해주는 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구원을 펼쳐내시는지 진행되어가는 모습을 보면 감격스럽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경이 원래 그렇듯 창세기도 창조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창조 기사에서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는 언제 창조되었는지, 사단은 언제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과학적인 사실들과 지식들도 충분히 제공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과학책이나 도덕책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사랑과 구원의 계획이 담겨있는 책입니다.
그렇기에 분명히 역사적으로 실제 일어난 일들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책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목적이 역사를 기술하거나 과학적인 변증이나 설명을 하려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작정과 의도로 역사를 그렇게 이끌어내셨는지에 대한 결과뿐입니다.
목적과 의도가 있는 책은 그 목적과 의도를 견지하며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우리를 향한 놀라운 계획과 사랑을, 미리 계획하시고 그 모든 것을 행하신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발견하게 되고 놀라게 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창세기는 사람들에게 가장 터부시되는 책인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두 창세기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성경 66권 중에는 제일 많이 읽어보았고, 어려서부터 익히 들어왔던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수학으로 치면 ‘집합’에 해당하고, 영어로 치면 “fine, thank you and you”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다시 들여다보는 것은 이제 더이상 우리의 흥미와 관심을 끌지 않습니다.
새로울 것도 없을뿐더러, 흔히 창세기를 마치 단군신화나 유년 시절 읽었던 올림포스 신화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성은 진화론과 같은 이론에 더 기울었고, 아직까지 창조를 믿는다고 하면 유아 취급을 받기 일쑤인 사회 속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지성인이라면 창조를 거부해야 하는 이 시대에서 살아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창세기를 터부시해야 지적 유아기를 탈피하는 것이 되는 듯 느껴지기 때문에,
우리는 창조를 쉽게 외면하게 됩니다.
그러니 창세기에 대한 궁금함도 열정도 관심도 남아있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이 못내 속상합니다.
창세기는 그런책이 아닙니다. 
창세기는 신화가 아닙니다.
이솝우화 같은 교훈이 아닙니다.
창세기는 진실이며 역사적 사실이며 진리이며 소망입니다.
창세기는 진정한 우리 삶의 행복과 만족의 기원을 알게 해 주고,
상황과 환경을 넘어 역사하시는, 그리고 우리의 현실을 극복해 나가실 하나님의 깊은 배려와 선하심을 발견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세기 앞에서 밤의 경점과 같은 인생을 소중히 그리고 담대히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창세기를 접하는 우리의 고백이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창세기, 나의 사랑하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