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무질서와 혼돈 속에서 말씀으로 질서를 세워가시는 방법으로 육일간의 창조 사역을 이어가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창조라는 작업에 시간이 필요하신 분은 아니었습니다.
육일이라는 시간은 하나님께 부족하거나 꽉 찬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혹시 작업이 미뤄져 육 일이 아니라 칠일을 작업하셔야 될 수도 있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원하신다면 하루 만에도 모든 것을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아니, 전능하신 하나님은 한순간에라도 모든 것을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시간에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 초월하는 존재이시기에 시간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에 육일이라는 시간을 사용하신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그리고 어떤 계획과 뜻을 가지고 계시는지 인간에게 계시해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신 시간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계시 의존적 창조 행위였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내적인 그 계획을 모두 구현하여 밝히시는 분이 성자 하나님이시지요.
그래서 그분을 ‘계시’라, ‘말씀’이라 부릅니다. 

지구가 진공의 우주 공간에 맞닿아 있는 공허함을 질서로 채우셨던 둘째날 궁창의 창조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원하신다면, 물과 물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그곳에 대기를 채우시며 궁창을 창조하시면서
동시에 땅을 물 위로 융기하도록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둘째 날과 셋째 날의 창조를 한꺼번에 하실 수도 있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둘째 날의 창조와 셋째 날의 창조를 굳이 구분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한계 때문이 아닙니다.
계시의 목적 때문입니다.
무엇을 계시하고자 하셨을까요?
둘째 날의 창조는 다른 날과 다르게 보시기에 좋았다는 평가의 말씀이 없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내적인 계획과 일치할 때에
하나님은 그것을 인증으로써 승인, 공인하시며 보시기에 좋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둘째 날의 창조에는 그 표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비교하였을 때 완성형의 모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셋째 날의 모습을 향해가는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셋째 날과 둘째 날의 창조를 구분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승인이 없는 둘째 날이지만,
이날은 하나님의 계획에서 간과할 수 없는 어떤 순서가 있음을 계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나누어져 있던 물이 합하여 사망의 깊은 물로 변하는 유비는
성경에서 많은 경우 심판의 모습에 사용되는 유비입니다.
사망 권세를 상징하곤 하는 바다는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유비해 줍니다.
노아 때 심판이 그러했지요.
나누어져 있던 물이 다시 만나 깊은 물을 이루며 세상을 심판했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 애굽 군대에 대한 심판도 그러했습니다.
나누어져 있던 바다가 다시 합하여 깊은 물로 애굽군을 심판했습니다.
사망의 심판은 피해갈 수 없습니다.
둘째 날을 넘어야 셋째 날이 오듯,
창조의 결말인 계시록에서도 사망의 둘째 심판을 넘어야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합니다.
아무도 약속의 땅을 얻기 전에 쏟아질 깊은 물의 사망 권세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방법은 한가지, 우리 대신 그 사망 권세를 담당할 누군가의 품에 숨는 것입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 대신에 방주가 깊은 물에 대신 던져졌듯,
우리는 우리 대신 사망 권세에 던져지신 예수님 안에 숨어야 합니다.
피해갈 수 없습니다.
부딪혀야 합니다.
예수님이 없이는 그 사망의 바다를 견뎌낼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