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철학자로 잘 알려진 샤르트르는 자신의 저서 [악마와 선한 신]에서 ‘상상 시선’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누군가가 열쇠 구멍으로 다른 사람을 훔쳐보고 있다면,
훔쳐보는 사람은 자유로운 주체일지 몰라도, 관찰당하는 대상은 비인격적으로 객체화된다는 내용입니다.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을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의 행동에 제약이 걸리게 되며 자유를 빼앗기게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열쇠 구멍으로 훔쳐보던 사람 또한 자신이 몰래 지켜보고 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된다면
수치심이 생겨 그도 결국 자유와 주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말합니다.

샤르트르는 그렇기에 만약 절대자처럼 인간 내면의 일거수일투족을 꿰뚫어 보고 지켜보는 존재가 있다면,
인간은 그 시선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객체가 되고, 그것은 절대자가 인간을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샤르트르가 말하고자 한 이야기의 의도는, ‘인간은 자유롭기에 신은 없다’는 것인데,
사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선 신은 있어선 안 된다’는 주장인 것입니다.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신이 있다면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죄악에 시시비비를 가릴 신은 있어선 안 된다는 논리입니다.
이는 마치 칸트가 도덕적 세계를 위해선 반드시 신이 있어야만 한다고 말했던 ‘신 존재 요청’에 반대되는,
일종의 ‘신 비존재 요청’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롭기에 신은 없다’는 이러한 논리 전개는 사실,
인간이 자유롭고 싶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해야하는 얄팍한 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사실을 싫어한다고 해서, 그래서 그 사실을 부정한다고 해서, 사실 관계가 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만 왜곡될 뿐이죠.
샤르트르의 주장에 어느정도 맞는 점도 있는데, 그가 지적하듯 인간은 절대자의 시선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사실상 인간은 샤르트르가 말하듯 절대자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이 벌거벗은 것 처럼 드러나게 되는 두려움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내면이 투명하게 공개될까 봐 공포 속에서 자신을 가리고 숨기고 단장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괜찮아 보이도록, 불투명하도록 자신의 외피를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마음의 방어벽은 숱한 방어기제들로 나타납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내면에 있는 죄악을 가리고 숨기려 하고,
그 시도가 허술해지면 얼마든지 남의 탓을 하며 책임과 비난의 시선을 회피하려 하는 존재입니다.
아무도 이 양심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비난의 시선과 양심 앞에 두려움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가려보려 해도 가려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금지하셨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눈이 밝아진 후, 자신이 벗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어 몸을 가린 아담은 하나님의 임재를 피해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아담이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벗었으므로 두려워 숨었다고 합니다.
아담이 자신을 가리고 몸을 숨긴 것은 하나님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두려워합니다.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이 벌거벗은 듯 밝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앞에서는 한점 죄악도 서 있을 수 없고 멸절하기에
죄인들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피하려 하고, 숨으려 하고 외면하려 합니다. 

그런 인간에게,
아무리 노력해도 가릴 수 없고 숨길 수 없어 절대자의 시선 앞에서 멸절하게 될 인간에게, 
하나님이 내밀어주신 해결책은 아이러니하게도 완전한 가려주심이었습니다.
시들어 말라버릴 나뭇잎 옷 대신에 하나님은 제대로 된 옷을 만들어주십니다.
죽음이 없던 세계에서 처음으로 생명을 죽이신 분은 놀랍게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짐승을 죽여 얻은 가죽으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가리고 싶던 그 초라한 내면을 완전하게 가려주십니다.
심지어는 하나님 당신도 그 옷을 꿰뚫어 보지 않으시고, 그가 입은 옷으로만 바라봐주십니다.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히10:1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4:7,8)

그래서 이 옷을 입은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워 보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피로 만든 옷이기에 그 옷을 보면 아들만이 보입니다.
아들의 옷을 입고 우리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심판하러 오시는 분이 아니라 아들로 품어 안으시려고 오시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