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세상은 아담 안에서 아담과 함께 타락하였습니다.
아담은 모든 피조세계를 대표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언약을 맡은 자였기 때문에,
아담의 타락은 보통적인 자연의 법칙대로 출생하는 모든 존재들에게 죄로 말미암은 상흔을 깊게 남기게 되었습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아담의 첫 범죄를 원죄라고 합니다.
원죄로 인하여 우리에게도 죄에 대한 값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성경은 그러한 죄에 대한 삯을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도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하실 때,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물론 아담에게 육체의 사망이 범죄의 순간 즉사하듯 일어나진 않았으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단절되어버린 죽음은 인간의 인생에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것은 예를 들면 생화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어 보여도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죠.
꺾여진 꽃이 뿌리와 줄기로부터 영양분을 받지 못해 결국엔 시들어버릴 운명을 피할 수 없듯,
사람은 꺾여진 꽃처럼 생명과 은혜를 단절 당한 채 죽음을 향해 달려갑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인간은 살아있어 보이는 순간조차, 조여오는 사망의 그림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사망이 인생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두려움은 인생 저편에서부터 숨겨지지 않고 인간을 향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우리는 느끼게 됩니다.
이를 은혜의 단절, 곧 비참함이라고 부릅니다. 

먹는 문제로써 타락해서인지 아담이 받은 형벌도 먹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에덴에서는 은혜로 먹고살던 아담이었는데 이제는 땀 흘려 일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나마도 땅은 그런 인간에게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비하면 정말 보잘것없는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 더욱 노력하고 일해야 할 뿐입니다.
타락하기 전에도 인간은 일하는 존재였으나, 타락으로 인해 바뀐 것이 있다면,
노동이 더이상 기쁨이 아니라 고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땀 흘려 일해도 얻는 것은 기대에 턱없이 모자라는 보잘것없는 것들뿐입니다.
인생은 기대와는 다릅니다.
노력의 보상에 결코 공정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노력한 만큼 정직하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 누구라도 예기치 않은 사건과 사고 앞에서 속수무책이 될 뿐입니다.
농부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뭄이 오면 소용이 없습니다. 홍수가 생기면 소용이 없습니다.
인생의 비참함은 일한 만큼 보상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그것이 바로 죄로 인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의 단절, 은혜의 단절, 곧 비참함입니다. 

인생이 만약 노력한 만큼 결실했다면, 무엇이 고달프겠습니까?
한만큼 결과가 나온다면 공부할 맛 나겠지요.
노력 한 만큼 돈을 번다면 일할 맛 날 것입니다.
노력한 만큼 성과를 볼 수 있었다면 인생은 무척이나 재미있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쓴맛과 좌절은 기본적으로 불공정과 불공평,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리스크로 인한 인생의 두려움 앞에서 발생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인간은 치사해지고 치졸해지고 사악해지고 미천해지고 그래서 비참해집니다. 

그래서 인생엔 은혜가 필요합니다.
한만큼 먹고 사는 것은 팍팍합니다.
긍휼이 많으신 주께서 불쌍히 여겨주심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그분은 우리 대신 인생의 비참함을 온몸으로 맞아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순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인생의 비참함을 넘어서는 행복과 기쁨과 만족을 경험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인생의 비참함이 종말을 맞고 천국을 경험함이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