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은 아담과 하와에게 기대와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아들이었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부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약속의 후손을 주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메시야를 아들로 얻었다”는 의미로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었습니다.
한마디로 가인은 사단의 머리를 부수고 승리를 가져와 아담과 하와와 인류를 구원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아들입니다.
반면에 그의 동생 아벨은 ‘허무하다, 헛되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왜 아들의 이름을 헛되다고 지었을까요?
가인에게 모든 기대를 주어서 남은 기대가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가인이 태어나고도 오랜 시간 동안 원수인 뱀의 머리를 부수고 승리하는 일이 없고 달라지는 것이 없어 실망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아담과 하와는 가인의 동생을 ‘헛됨’이라는 뜻의 아벨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가인과 아벨은 모두 각자의 결실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립니다.
한쪽은 모든 기대와 촉망을 받는 아들이고, 한쪽은 기대감이 전혀 없고, 존재감조차 없는 아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두 형제의 제물 중,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보란 듯이 아벨의 제물만을 받으셨습니다.
혹자는 가인이 피 흘림이 없는 제물을 드렸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가인이 드린 제물은 좋은 것들을 따로 챙기고, 제물로 드려도 아깝지 않을 것들만을
그냥 형식적으로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보신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인 소제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물이 아닌 곡식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가인이 아까운 마음으로 떨거지 곡식을 제물로 드렸을 것이라는 가정도 성경에서는 찾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오히려 땅의 소산이라고 할 때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 ‘페리’는 구약의 다른 구절에선 하나님께서 제물로 요구하시고 또한 받으실만한 열매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가인 또한 하나님께 최선의 것을 가지고 나왔던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가인이야말로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노력과 최선을 다한 결과물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인은 부모와 형제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이 기대에 부응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헛된 기대가 아니었음을 삶으로 증명하기 위해 가인은 인생의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와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보여줄 게 없을 것 같은 아벨의 제물만을 받으셨습니다.
이로써 진정 헛된 것은,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아벨이 아니라,
가인의 노력과 공로야말로 헛된 수고였음이 증명된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안에 있는 어떤 것을 선하게 여기고 소망으로 삼고 갈고 닦아 수양하고 노력하고 정진하는 것만큼 헛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사람이 보기에나 괜찮아 보이는 것일 뿐,
하나님은 사람이 내보일 수 있는, 선보일 수 있는, 자랑할 수 있는 것들을 눈여겨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를 선하게 의롭게 가치 있게 여기시고 바라보십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가 옷 입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 얼마나 탁월한 자질을 갖추었느냐가 아닙니다.
아벨은 가진 것이 없음에도 하나님께서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바라봐 주시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비결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