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은 변명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는 자신의 친형제를 죽였고, 아벨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을 범죄에 이용하였습니다. 
그리고도 회개는커녕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니냐’는 뉘앙스로 하나님을 탓합니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 하는 되물음은
‘그렇게 아벨을 아끼고 사랑했으면 내가 무얼 하든 하나님이 지켜주시면 되었을 것 아니냐’며 하나님을 탓하려는 가인의 의도가 잘 드러납니다.
심지어 자신의 죄짐을 지기가 무겁다고 볼멘소리를 합니다.
손바닥이 발바닥이 되도록 빌어도 모자란 판에 형벌에 대해 과하다는 식의 투정이라니…
여러 면에서 보아도 가인은 구제 불능의 죄인이 분명입니다.

가인이 피 흘린 범죄로 말미암아 땅은 부정해졌습니다. 
그래서 땅은 ‘가인을 죽여 복수를 해달라’고, 신원해 달라며 입을 벌려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땅이 이렇게까지 호소하는 것은 이유가 충분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함을 받을 수 없느니라”(민35:33).
따라서 이런 가인의 친족 살해 범죄는 하나님의 공정하심 앞에서 율법대로 한다면 반드시 그를 죽여 피를 흘려 갚도록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피 흘린 죄에 대하여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9:6).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대하실 때, 
성경대로 범죄자에게 단죄를 내리리라 생각하는 우리의 기대를 보란 듯이 외면하십니다.
마치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자 기대하는 마음으로 제물을 가지고 나왔던 가인의 제물을 외면하셨던 때처럼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십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가인에게 질문으로 찾아오십니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그러나 하나님은 정말 몰라서 물어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훈육하기 위해 물어보듯,
하나님은 아담을 사랑으로 대하신 것처럼 가인에게도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자신의 죄짐을 지기가 너무 무겁다는 그에게, 남들이 자신을 죽일까 봐 두렵다는 그에게,
하나님은 지켜주겠다는 약속으로 표를 주시기로 약속까지 하십니다.
가인을 해치는 자에게는 벌을 7배나 더하시겠다고 하실 때,
하나님은 가인을 이미 지키시고 보응해주실 자신의 백성으로 여기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가인에게 이토록 이해할 수 없는 자비를 베푸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는 대상의 상태에 달렸지 않음을,
대상의 어떠함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달린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가인은 구제 불능의 살인자였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아담도 살인자였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온 인류가 박리되도록 살해한 자가 바로 아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원죄의 죄책과 오염 아래 태어난 우리도 실은 살인자입니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분을 내는 것만으로도 살인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살인하지 않았다고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고개 들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가인뿐만 아니라 우리도 살인자인 것입니다.
가인에게 손가락질하고 분노했던 그대로, 사실 우리가 그런 형벌을 받아 피를 흘려 죗값을 감당했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랬던 우리에게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라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히셨던 것처럼,
마치 가인에게 표를 주사 에녹을 낳고 에녹 성을 쌓게 하신 것처럼,
자격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가인에게처럼 은혜의 표를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격 없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입었다면, 이제 우리는 가인을 바라볼 때 자신을 바라보듯 불쌍히 여겨주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의 가인들에게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