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장에서는 라멕과 그의 유명한 아들 셋이 언급됩니다.
세 아들의 이름은 각각 야발, 유발, 두발가인입니다.
이들은 모두 ‘흐르는 시내’라는 뜻의 이름을 가졌습니다.
이들의 이름에서 강으로 둘러싸인 옛 유토피아 에덴이 연상됩니다.
자신의 성읍을 풍요로운 에덴처럼 가꾸고 싶어 했었던 라멕의 마음이 그의 자녀들 이름에서 느껴집니다.
야발은 가축을 치는 사람들의 시조입니다.
농사가 아닌 목축을 전문업으로 하여 살아가려면 물물교환과 매매가 일어나야 합니다.
라멕의 도시는 분명 경제활동이 태동하여 활발히 성장했습니다.
경제의 성장은 삶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유발은 관악기와 현악기로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음악과 문화의 시조였습니다.
도시에 인구가 밀집하고 경제력이 성장하면 문화가 꽃피우게 됩니다.
지금도 문화의 힘은 대단한 것이지만 당시에 문화라는 것은 엄청난 영향력입니다.
두발가인은 금속으로 기구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농기구와 같은 도구들을 금속으로 만든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돌에서 금속을 녹여내어 제련하고 필요한 모습으로 가공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당시로써는 최첨단 기술인 것입니다.
기술의 발달은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줍니다.
게다가 이렇게 만든 농기구들은 유사시에 전쟁에서 냉병기로 사용될 수 있으니 이 기술의 발달은 군사력도 갖추게 해줍니다.
풍요하고 편리한 더 나은 사회로 문명이 진보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도시화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애초에 가인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성을 쌓았던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피해 성벽 뒤에 모여 사는 가인의 자손들과 그렇게 발생한 도시 문명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루소와 같은 철학자들도 도시에 대해 부정적이었습니다.
순수하고 순진한 사람들이 도시에서 그 영혼이 더럽혀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것은 도시와 문명의 탓이 아닙니다.
칼 자체는 좋은 것이어도 그 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듯,
돈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듯,
도시와 문명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도시를 운영하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라멕은 아들 세대에서 이룬 풍요로움과 문화, 기술적 발달과 군사력을 이용하여 노래를 부릅니다.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 내 상처 때문에 사람을, 내가 죽였다, 내 상함 때문에 소년을.”
음악은 당대의 시대상을 담은 그릇입니다.
라멕의 노래를 보면 당시 사회의 죄악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라멕은 그의 노래를 통해서 극한의 이기주의와 폭력성, 공감력 결여와 과시의 민낯을 처절하게 보여줍니다.
문제는 이런 죄악의 문제가 라멕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인간의 보편적 죄성은 라멕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는 라멕과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풍요로움과 편리해진 생활은 에덴의 꿈을 실현 가능한 것으로 느끼게 해주지만,
아무리 경제가 성장하고 문화가 발전하고 기술이 향상해도,
정치적 이념과 체제가 진보해도, 그래서 더욱더 풍요롭고 편리한 사회가 된다고 할지라도
이런 죄인들이 운영하는 도시는 당연하게도 유토피아가 될 수 없습니다.
라멕과 같이 자신의 힘만 믿고 사는 사람들로 가득한 사회란, 그저 풍요롭고 편리한 지옥에 불과합니다.
라멕은 에덴 같은 유토피아를 꿈꿨으나 경제적 성장으로 인한 풍요와 기술의 발달로 인한 편리함은 결코 더 나은 삶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자신의 힘을 믿고 사는 삶이란…
만인이 만인을 향하여 이리와 같이 투쟁하는 약육강식의 삶이란…
결코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준비하시는 도시는
내 힘을 믿고 사는 강한 자들의 도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사는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위한 도시입니다.
그렇기에 내 힘으로 과시하고 복수할 수 있는 그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십자가를 지고 죽는 연약해 보이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인생을 천국으로 세워가는 비결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