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노아를 “의인이요 당대의 완전한 자”라고 소개합니다 (창6:9).
성경의 다른 구절에선 “의인은 없나니 한사람도 없다”(롬3:10)고 했는데,
그렇다면 노아는 예외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당대에’라는 표현처럼 그 시대 사람들의 악행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의로웠다는 뜻일까요?
그러나 만약 노아를 ‘시대상을 반영해 비교적 의롭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준이 아니라 상황이나 다른 사람이 의로움의 기준이 되는 것이기에, 상황윤리적인 표현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선과 악의 기준은 탄력적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의로움과 선하심의 유일한 기준이 되십니다.
그렇기에 오직 하나님만이 선악간에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전12:14).
성경이 노아가 의롭다고 선언했다면, 그건 정말 노아가 하나님의 그 기준에 합당할만큼 의로워야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이 노아를 의인이라고 선언한 것은, 분명 노아가 하나님의 눈에 보기에도 의로웠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사람이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할만큼 의롭게 살 수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어째서 높으신 선악의 기준을 갖으시고서는 동시에 원죄의 영향 아래 있는 한 개인을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일까요?
의로운 자, 의인이란 대체 어떤 사람인 것일까요?
성경에 노아 외에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인물들의 묘사를 살펴보면,
노아를 의인이라고 부를 때의 ‘의로움’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을 때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여겨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의로움의 기준’을 대폭 낮추셔서 ‘믿음이라는 행위만으로도 온전한 순종으로 여기고 의롭게 여겨주시겠노라’는 뜻의 말씀이 아닙니다.
선과 악의 기준은 탄력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의 기준을 ‘행위’에서 ‘믿음’으로 할인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도달할 수 없는 의로움을 향한 우리의 순종’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하나님의 뜻과 기분에 합당한 순종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어 그 예수의 공로로 옷 입게 하신 것입니다.
즉 죄인이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라는 의의 옷을 입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실 때, 우리의 부족한 본성이 아닌,
우리가 입은 그리스도의 옷을 통해 바라봐주시고 의인이라 평가해주시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의롭다는 하나님의 선언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평가가 아닌, 그리스도의 행위에 대한 평가인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그러므로 의인이란 바로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게 된 사람을 말함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노아가 의로웠던 이유도 바로 이 복음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11:7).
그러므로 ‘당대에 완전한 자’ 였다는 표현은 바로 노아가 그리스도로 옷입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당대에 선포하는 자였음을 설명해주는 표현입니다.
완전하다는 뜻의 히브리어인 ‘탐밈’은 흠이 없다는 뜻인데, 흠이 없다는 표현은 주로 제사에서 흠없는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질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즉 노아는 흠없이 하나님의 공의에 드려지신 예수님의 예표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