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던 둘째 날,하나님은 궁창을 만드시고
그 궁창을 기준으로 ‘흑암이 깊음 위에 있어 땅이 혼돈’하던 그 ‘혼돈의 물’을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어 두셨습니다.
그리고는 나누신 그 물이 합쳐지지 않게끔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눈에 보기에 좋은 모든 것을 행하려’ 하는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능멸하고 가정을 훼손하여 그 결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남녀의 사랑을 통해 보여지게 될 하나님의 영광도 가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그들의 죄악으로 가려지게 되자,
하나님의 질서가 이 땅에서 물러가게 되고 결국 세상은 둘째 날로 회귀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노아 때의 홍수는 질서 안에서 일어나는 자연재해가 아닌 질서를 잃음으로써 당하게 되는 심판으로서의 재앙이었습니다.
이 홍수는 일상적인 방법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흐르는 자연의 질서가 역행하고 물리 법칙을 거슬러, 땅속에서부터 물이 터지듯 솟구쳐 올랐습니다.
하늘에선 구름보다 높은 곳에서 궁창에 구멍이 뚫린 듯 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이 다시 합하여 혼돈의 물, 사망의 물을 만든 것입니다.
사실 노아의 방주와 홍수에 관한 성경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자연 현상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없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방주에 실린 동물들은 노아가 일일이 발품 팔아 채집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동물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암수 짝을 지어 스스로 나아온 것이었습니다.
각 동물을 대표할 짐승들이 각각 ‘충분한 유전적 다양성’을 지닌 개체로 선별되었을 과정도 그렇고,
동물들이 암수 짝을 지어 줄 서서 노아에게 나오는 모습도 자연적인 현상으로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홍수를 대비하고 준비하는 과정은 모두 자연의 법칙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하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정작 홍수 그 자체만큼은 자연의 현상으로 보고 싶어 합니다.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었던 재해로서,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자연 현상 중에 하나로 치부하려 합니다.
그래서 전 세계의 신화와 설화에 홍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이 보편적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하려 합니다.
물론 홍수라는 것은 현재도 발생하는 자연재해입니다.
그러나 노아 때의 홍수는 그런 류의 홍수가 아니었습니다.
분명한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일어난 심판이었습니다.
죄인들에게 ‘죽음’이라는 죄의 형벌을 분명하게 결과로서 안겨준 사건입니다.
인간이 자꾸만 ‘죽음’이라는 것을, ‘악에 대한 정의의 개입’ 즉 ‘심판’이 아니라, 자연재해 쯤으로 여기고 싶어 하는 이유는
자신의 죄악에도 언젠가 닥치게 될 심판을 외면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높은 산으로 도망쳐도 홍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듯, 인간은 아무리 회피하려 해도 죄에 대한 삯인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혼돈의 물, 사망의 물로 죄인들을 덮어버리는 심판은 사실 노아 때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를 보면,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후세를 낳고 살다가 결국은 죽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렇습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에서부터 이미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죽음’의 릴레이, ‘죽음의 홍수’는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족보에선 오직 에녹만이 이 죽음의 홍수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홍수 심판에서는 노아만이 홍수의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홍수 때 죽은 것이 아니어도 인간은 모두 죽고 있었고, 또한 지금도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몰려오는 죽음의 물결에 누가 먼저 죽느냐 나중에 죽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노아 때나 지금이나 같다는 것이죠.
혼돈과 죽음의 물결, 심판의 파도 속에서 노아와 가족들만이 안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방주가 대신 죽음의 물결에 던져졌기 때문입니다.
방주는 홍수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땅이 되어주었습니다.
구원의 방주,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그림자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방주이시고 반석이고 새 땅이 되어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