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가 나면 마실 물이 없습니다.
주변이 전부 물바다인데 정작 마실 물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러니합니다.
방주에서의 생활은 고되고 힘든데, 아이러니하게도 방주 말고는 쉴 곳이 없습니다.
방주가 힘들다고 방주 밖으로 나갈 수는 없습니다.
방주 밖은 홍수의 물이 가득하고 죽음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이 기간이 언제 끝날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그는 방주에서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어놓아, 물이 얼마나 감했는지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까마귀와 비둘기는 서로의 활동을 비교해보기에 좋은 대조군입니다.
까마귀는 홍수로 인해 수많은 생명이 죽어 떠다니는 상황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운 날짐승입니다.
얼마든지 시체 위에 내려앉을 수 있고 썩은 고기로도 배를 채울 수 있습니다.
까마귀에게는 답답한 방주보다 바깥세상이 오히려 편하고 자유롭습니다. 불편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까마귀는 마음껏 방주를 왕래합니다.
반면에 비둘기는 방주 밖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 작은 발바닥을 잠깐이라도 딛고 쉬어갈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합니다.
지친 날갯짓을 쉴 수 있는 곳은 오직 노아의 방주뿐입니다.
그래서 비둘기는 노아에게로 돌아옵니다.
홍수의 물이 마르기까지 비둘기의 쉴 곳은 오직 방주뿐입니다. 

그래서 비둘기는 정결하게 쉴 수 있는 땅이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표지판 역할을 합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은 비둘기처럼 그에게 내리셨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발바닥을 쉴 수 있게 해줄 안식의 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를 이끌어 진정한 안식이신 그리스도께로 이끌어갑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면, 우리를 비둘기 같이 살게 하실 겁니다.
홍수 같은 죽음의 기간 동안, 차마 부정한 것 위에는 내려앉지 못하게 하십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정착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불의한 이윤에 마음을 두지 못하게 하십니다.
죄악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썩은 고기로 만족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탐욕으로 배부르지 못하게 하십니다.
사단의 술수 위에 쉬어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마음에 평안을 얻지 못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오직 방주에서만 쉬게 하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발붙이고 살아갈 그 날까지 성령은 우리를 방주에 머물게 하십니다.
반면 시체 위에 내려앉을 수 있고, 썩은 고기를 먹고 살아가는 존재들에겐 홍수의 기간이 별로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불편함이 없습니다.
방주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쉴 수 있고 앉을 수 있고 먹을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홍수의 기간이란 오히려 마음껏 활개 치고 다닐 수 있는 자유로운 기간으로 보입니다. 

홍수의 기간이 끝나야 비둘기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비둘기가 가져온 감람나무 잎사귀는 노아와 방주의 생명들에겐 희망의 소식이었고,
결국 자유를 얻어 돌아오지 않는 비둘기는 안식의 땅이 완성되었음을 알려주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제 노아와 방주의 생명들에게 남은 것은 비둘기처럼 자유롭게 방주를 나서는 일뿐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밖으로 나가질 않습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날이지만 나가지 않습니다.
방주 밖 세상에 대한 낯선 두려움 때문일까?!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직 나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방주의 문을 친히 닫아주셨던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홍수 심판은 진정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홍수의 기간은 노아와 방주 안의 생명들에겐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이었겠지만,
비둘기의 소식을 받아들었을 때부터 방주 밖을 실제로 나가기까지의 기간이야말로 노아 일행에게 가장 길고 힘든 기다림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언제나 마지막을 앞둔 기다림은 더욱더 힘든 법입니다.
지금 우리의 사정이 그렇습니다.
악인들의 횡포가 그칠 줄 모르는 상황에, 이 악한 세상이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기에,
최후 승리를 약속받고도,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진정한 안식을 약속받고도,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이 마지막 기다림의 시간은 더욱 밀도 높은 괴로움으로 다가옵니다.
마지막 때가 힘들지 않다면 이상한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썩은 고기로도 만족하고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이 나가라고 말씀하실 새 하늘과 새땅의 그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