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와 가족들은 드디어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난 후 그들에게 본격적인 새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처음부터 해야 한다는 것은, 방주에서 365일을 꽉 채워 보냈던 시간만큼이나 힘겨웠을 것입니다.
식물들이 다시 자라서 열매 맺기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부족한 식량에 대한 막막함을 넘어 생사가 걸린 그야말로 삶의 투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은 고기를 먹는 것을 공적으로 허락하셨습니다.
홍수 심판 이전에는 식량으로 허락된 것이 식물뿐이었으나 이제는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때, 고기를 피째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고기를 피째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는 질문이지만, 사실 그 이유는 피째 먹지 말라고 하셨던 명령에 곧이어 등장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의 생명을 해하지 말 것을 명령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식량과 고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사람의 생명과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보여야 하는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직접적이고 적대적인 도전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피를 흘리게 하고 그 피를 취한 사람에게 반드시 그 핏값을 묻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피를 생명과 일치된 것으로 표현하곤 합니다.
고동치는 심장의 강한 맥박은 숨길 수 없는 가장 분명한 생명의 증거입니다.
숨은 잠깐 참을 수 있어도 맥박은 잠시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은 사람이 고기를 먹을 때 그 피를 먹지 못하게 하시는 방법으로서,
반드시 그 생명의 값을 요구하시겠다는 의미를 분명하게 시각화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고 훼손한 사람에게 반드시 그 값을 물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살인만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람이 타락하여 범죄함으로써 그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면 그는 결국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범죄이든지 간에 타락한 인간은 피 흘린 것과 같은 값을 하나님 앞에 물어야만 합니다.
이미 자신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타락으로 훼손해버린 사람이
다른 이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한 일에 대해 값을 지불할 능력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감당할 수 없는 피와 생명을 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식량으로서 주어진 짐승들은 그날 이후 사람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표현하고 있는 이 표현은 그저 달라진 인간과 짐승의 관계를 표현해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무서움과 두려움이라는 표현은 전쟁 상황에서 사용되는 군사적인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군사적인 용어를 이용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한 땅을 그들의 밥으로 주셨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짐승들이 인간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듯, 하나님은 가나안땅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게 하셨습니다(신11:25).
하나님이 짐승을 인간에게 고기로 주셨듯, 하나님은 가나안 땅 사람들을 이스라엘의 밥으로 주셨습니다(민14:9).
그래서 여호수아는 가나안땅 사람들을 가리켜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6장 3절에서 홍수 심판 이전에, 하나님을 떠난 패악한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은 그들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셨었습니다.
그때 육신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바사르’는 새롭게 식량으로 허락된 고기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나안을 상징하며,
우리에겐 하나님의 형상을 지켜가면서 동시에 정복해야 할 세상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