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포도와 무화과는, 하나님의 은혜 시기엔 그 소출의 풍성함으로,
심판의 시기엔 마르고 시들어버리는 모습으로, 언약적 시금석의 역할을 하는 과일로 등장합니다.
그렇기에 특히 포도로 만드는 포도주는 성경에서 언약적 의미가 담긴 안식의 음료로 그려지곤 합니다.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는 건, 포도 재배가 가능하다는 말이고,
이는 광야의 떠돌이 생활, 나그네 생활을 끝내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정복하고 안식의 땅에 정착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포도주를 만드시는 첫 기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십자가상에서 신 포도주를 마시는 것으로 ‘다 이루었다’며 공생애를 마쳤습니다.
포도주는 이렇듯 언약적 의미에서 안식의 음료입니다.
노아는 장막에서 포도주에 충분히 취하여 하나님 앞에서 이 안식을 누립니다.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아담처럼 노아는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는 살아있음의 기쁨과 자유를 만끽합니다.
그러나 노아가 장막에서 술에 취해 벌거벗은 모습을 본 아들 함은 이를 가십거리 삼아 형제들에게 떠벌립니다.
이는 개인적인 공간에서 자유로운 휴식을 누리던 노아에게서 태고의 자유를 수치로 벌거벗겨내는 조롱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만족하던 노아의 안식은 훼방을 받고 조롱을 받았습니다.
함은 단순히 아버지의 벌거벗음만을 비웃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을 비웃은 것입니다.
그 깊은 만족을 우스갯거리로 만들었기에 함의 잘못은 절대 가볍지 않습니다.
이에 노아는 함의 잘못을 책망하며 저주합니다.
‘종의 종이 될 것’이라는 노아의 저주는
훗날 ‘함의 후손들은 노예로 삼아도 괜찮다’며, ‘하나님이 명하신 운명이요 질서’라고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데에 사용됩니다.
교회는 발 벗고 나서서 흑인들에게 ‘백인에게 복종과 충성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쳤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노아의 저주는 함의 후손들이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실 때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과의 다툼을 예언하셨지만,
노아의 이 저주는 대상이 함의 자손들이나 가나안의 자손들이 아니라, 가나안뿐이었습니다.
함의 후손들을 대상으로 한 저주가 아니라, 가나안이라는 개인을 지목하여 선포된 저주입니다.
따라서 함의 잘못을 생물학적 후손들에게 연좌제 시켜 해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애초에 노예제를 정당화 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본문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잘못은 함이 했는데, 왜 그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은 것일까?
이는 죄를 생물학적 유전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언약적인 관점에서의 전가로 바라볼 수 있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함과 같이 하나님 백성의 안식을 방해하고 조롱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누가 되었든 ‘종의 종이 되게 하시겠다’는 심판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안식의 방해자를 대표하여 ‘가나안’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왜 하필 가나안인가요?
모세가 창세기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던 당시,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헤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주마 약속하신 안식의 땅을 점유한 채 그들을 방해하는 대적이 누구였습니까?
그들은 가나안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에 입성하고 나서도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게 하며 하나님의 안식을 방해하고 조롱했습니다.
따라서 노아의 저주는 그저 한 개인을 향한 저주나 한 민족의 운명을 예언하시는데 의의를 그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안식에 대적하는 모든 죄악 된 사람들과 그 안식을 가벼이 여기며 조롱거리로 삼는 자들에게 향한 저주로 이어집니다.
‘종의 종이 될 것’이라는 저주는 안식을 조롱하는 자들은 자유와 재산을 가질 수 없는 종과 같이 안식의 땅 또한 상속받지 못한다는 심판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의 피를 우리에게 안식의 포도주로 주셨습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믿음의 사람들 모두는 성령으로 취해야 하고,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신랑과 신부의 모습과 같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사랑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불만과 불평이 있다면 이는 내 인생을 이끌어오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며
안식의 즐거움을 가벼이 여기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오직 예수로 말미암아 깊이 만족해야 합니다.
그것이 안식을 소중히 여기며 즐거워하며 누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