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서로 충돌하는 두 가지 욕구가 있습니다.
이름을 내고자 하는 욕구와 흩어짐을 면하여 힘을 합하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이름을 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와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름에 가치를 만들어 존재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연약함과 능력의 부족함에 한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힘을 원합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상부상조, 서로에게서 도움을 받아 힘을 모으길 원합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작은 힘들이 모여 연합하게 되면, 그렇게 모여진 힘은 생각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모인 사람들은 합쳐진 힘의 거대함을 증명할 방법으로 거대한 건축물을 세웁니다.
그래서 바벨에서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제국들이 했던 일이 대규모 토목, 건축 사업을 벌이는 것입니다.
개인으로선 작은 힘일지라도 합심하여 협동할 때에 불가능이 없게 느껴질 만큼 큰 위력이 발생합니다.
공동체란, 큰 힘을 만들어 이름을 내고자 하는 욕구의 방법론적 결실인 것입니다.
한편으로 사람은 강력한 힘을 얻게 되면 모든 것을 예측 가능한 자신의 통제 아래에 두고 컨트롤하고 싶어 합니다.
변수를 통제하는 것이야말로 위력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시선과 손길을 싫어하고 자신들의 인생과 미래에서 하나님을 거둬내려 몸부림치며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은 사람의 통치 아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이 바라는 바대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예상되는 변수를 제거하고 싶은 인간에게 있어 넘어야 할 가장 큰 벽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의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미래의 안정된 삶을 보장받기 위해,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변수를 대신 할 수 있는 힘을 더욱 키우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개인으로선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더 모이기에 힘씁니다.
인간은 발전하는 기술과 문화, 문명이, 하나님을 극복하는 일을 수월하고 효과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기대합니다.
하지만 흩어짐을 면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더 강한 힘으로 결집하고자 하는 이 욕구는,
그 시작이 되었던 기본적 욕구와 충돌합니다.
이름을 내고자 하던 인정의 욕구는, 존재 증명의 욕구는,
거대해진 집단으로 덩치가 불려질 때 곧 부메랑처럼 개인의 개성과 욕구를 속박하기에 이릅니다.
공동체에 힘이 집중될수록 개성은 함몰됩니다.
거대해진 도시는 개인을 삼켜버립니다.
개인의 욕구와 각각의 소망이 공동체 안에서 충돌할 때 거대 의지는 인간을 뭉쳐진 찰흙처럼 짓뭉개 흡수하고 말 것입니다.
어쩌면 전체주의가 꿈꾸는 사회가 그런 사회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그들의 ‘스스로는 멈출 수 없는 응집력’을 와해시키셨습니다.
언어를 혼란케 하셔서 모래 알갱이처럼 흩어버리셨습니다.
소통의 벽은 단순한 언어의 단절뿐이 아닙니다.
마음의 단절입니다.
이로써 서로의 욕구는 이제 더 이상 하나로 뭉쳐지지 못합니다.
인간은 도시, 제국이라는 거대 괴물에게 흡수되어 버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 인간은 파편화되고 고립되어 외로움과 고독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 마음 알아주는 사람, 내 맘 같은 사람 없이, 인간은 모두 서로에게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은 욕망의 거대 실체 앞에 산화되거나 잡아먹히는 대신, 고독의 절망 앞에 함몰되게 된 것입니다.
두 가지 모두(전체주의vs개인주의) 인간에게 있어 구원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는 구원의 시작입니다.
사망의 그늘에 홀로 앉아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하나님과의 진정한 소통을 시작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증명하려 하지 않아도 우리의 존재를 인정하시고 존귀하게 여겨주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아시고, 부르시고, 사랑하십니다.
바벨의 도시에서 나와 하나님의 도시로 갑시다.
하나님 나라는 폭력적으로 우리를 삼키는 욕망의 나라가 아닙니다.
죄인들의 욕망으로 시작한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