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기원과 문명의 시작을 다룬 창세기의 원역사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류의 반복되는 범죄와 거듭되는 실패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도전과 살인 사건, 힘의 원리로 운영되는 폭력의 사회와 그로 인한 홍수 심판, 그러고도 정신 차리지 않고
여전히 힘의 원리를 갈망하며 힘을 모아 하나님을 대신하려 했던 교만의 내용들이 창세기의 전반부를 빼곡히 채우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성경은 관심을 잃지 않은 채, 노아의 뒤를 이은 셈의 후손들을 따라나섭니다.
족보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족보는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이야기하셨던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이 어떻게 결실하게 될 것인지를 추적해가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근근이 연명해오는 핏줄을 따라 약속이 흘러가고 있음은 그야말로 가망 없는 세상에 한줄기 실낱같은 희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속된 ‘여자의 후손’을 향해 흘러가던 소망의 계보는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합니다.
데라의 장자 하란이 아버지보다 먼저 급작스러운 죽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에서는 각 세대마다 ‘죽었더라’라는 표현이 반복되던 것과 다르게,
11장의 족보에서는 하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는 여태껏 죽었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았었기에 더욱더 충격입니다.
아들의 죽음이라는 사고에 정면으로 충돌한 데라는 갈대아 우르라는 일상에서 이탈하게 되지만,
결국 하란의 충격을 벗어나지는 못하고 하란에 머물다 하란에서 죽습니다.
아들의 이름과 같은 이름의 도시 ‘하란’에서 데라는 하란처럼 ‘죽었다’는 표현으로 족보에서 급작스레 퇴장합니다.
아들의 죽음이 아버지의 죽음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듯 기술된 것은, 족보의 목적을 생각해볼 때 더욱 심각한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사망의 사건 사고가 아닙니다.
데라의 족보는 더 이상 하나님의 약속을 담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데라와 이 족보의 조상들이 우상 숭배자들이었음을 고백합니다(수24:3).
하나님을 알고, 인간의 창조 목적을 알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이름과 구원의 약속을 보존해야 하는 마지막 가문이 우상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언약의 계보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희망은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게다가 데라의 또 다른 아들 아브람은 아이를 낳지 못해 후계자가 없으니, 이 족보는 실질적으로도 곧 죽음을 맞게 될 것입니다.
족보는 그 끝이 소망이 아니라 죽음에 다다랐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바로 그런 죽음 속에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어떤 대단한 자질이나 가문이나 상황에서가 아니라, 전혀 소망 없는 죽음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부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부르심도 그렇습니다.
죄로 인해 이미 죽어있던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본다 한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아무 방법도 가망도 없었을 우리입니다.
은혜란, 가망 없는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사고를 정면으로 부딪친 우리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발적이 아니라 선하신 계획 가운데 있었음을,
보물찾기처럼, 틀린 그림 찾기처럼 보여줍니다.
노아가 500세에 낳았던 아들은 셈이 아니었고, 데라가 70세에 낳았던 아들은 아브람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당연히 셈도 아브람도 장자로서 후계자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셈은 노아가 503세에, 아브람은 데라가 130세에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고 지나치는 이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숨겨진 계획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장자가 아닌 의외의 인물을 통해 일하시곤 하십니다.
가인 대신 셋을, 에서 대신 야곱을, 사울을 폐위하시고선 엘리압 대신 막내 다윗을 부르십니다.
이를 통해, 언약의 대표자였던 첫째 아담 대신 둘째 아담을 준비하셔서 구원하실 것임을,
왕궁에서가 아니라 말구유에서 태어난 메시야로, 정복으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임당함으로 구원하실 하나님의 계획을,
셈에게서 그리고 아브람에게서 보여주십니다.
성경에서 그 은혜의 흔적을 발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발적이 아니었음에 안심하게 됩니다.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계획입니다.
부르심의 은혜란, 우리의 준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