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폐허와 같은 족보의 끄트머리에서 희망의 씨앗을 구별하여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와 난임 등으로 소망이 없던 아브람에게 찾아와 하란을 떠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식이 없던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가나안땅의 세겜을 지날 때도 ‘이 땅을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은 하란에서 아브람을 불러내시면서 그에게 새로운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성경은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실 땅’이 아니라, ‘보여주실 땅’이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땅을, 그가 아니라 그의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들은 우선 아브람에게 자손이 있을 때에야 가능해지는 것들입니다.
약속하신 모든 복락은 그 자손에게서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엄연하게 말해 복은 아브람이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의 자손을 통해 허락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아브람은 평생 그의 명의로 된 부동산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여전히 자식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래도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자손 사이에 복의 관계가 궁금해집니다.
창세기 12장 7절에서 ‘자손’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째라’는 원래 씨앗이라는 뜻입니다.
복수형이 아니라 단수형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그 땅을, 아브람의 ‘자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람의 ‘자손’이라 인정되는 어느 특정 한 개인에게 주시겠다고 하심입니다.
그렇다면 약속의 땅을 얻게 될 자손으로서의 ‘씨앗’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갈라디아서 3:16에서 바울은 ‘자손들이라 하지 않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라고 말합니다.
즉 아브람의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주마 약속하신 그 땅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얻게 될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가 준비하시는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의 실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 복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복이신 예수님은 아브람과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복을 시작하게 한 ‘복의 시작’인 것입니다.
하지만 복의 시작인 아브라함도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을 얻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해서,
마리아가 예수님보다 더 뛰어나고 더 높은 존재라는 말이 아니듯,
하나님이 사람의 아들로 오실 만큼 그렇게 낮아지셨다는 말이듯,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현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시작, 믿음의 조상이 되었지만,
아브라함에게서 복과 은혜의 탁월함이 그리스도에게 흘러 들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브라함의 자손’에게서 복과 은혜의 탁월함이 아브라함을 덮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예정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 시켜 주심으로, 그리스도의 아들 됨이 우리의 것이 되듯,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그리스도의 지위도 우리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율법에 순종하시고 얻으신 예수님의 의로움과 모든 복락 또한 모두 우리의 것이 됩니다.
성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성자에게 의로움과 새하늘과 새땅과 영생을 주시고,
성령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얻은 그 복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것이 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아브람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복이신 예수님과의 연합으로 그는 복이 되었습니다.
복이신 예수님과의 연합으로 우리는 복이 되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하나님은 그 아들의 이름에 복을 담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새하늘과 새땅을 유업으로 얻습니다.
진정한 복의 시작,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