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입니다.
그리고 그 기대는 내가 기여한 정도에 따라 비례하여 커집니다.
그렇기에 어렵게 믿음의 결단을 내리고 하나님이 부르신 길로 접어든 사람이 만나게 되는 기근은 당황을 넘어 황당과 황망함을 가져옵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찧는 일이 있을 수는 있어도,
믿었던 하나님에게 외면을 받는 것 같은 상황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착각했거나, 애초에 하나님이 책임감이 없으신 분이거나,
둘 중 무엇이 되었든 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움직여도 기근을 만나더라’는 경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의 근본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정적 경험에 대한 반복 학습이 우리의 사고에서 하나님을 확실성이 아닌 가능성의 영역으로 격하한 신뢰도 평가를 하게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사고 속에선
“하나님이 부르셨지만, 하나님이 돕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이 명하셨지만, 하나님이 책임지지 않을 수 있다.
믿음의 결단을 했지만, 결과는 기근일 수 있다”라는 가능성이 고려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험 요소,
곧 ‘믿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외면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리스크를 극복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시지 않더라도 손실을 줄일 방법,
그것은 리스크인 하나님을 배제한 인생 계획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에게 맡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신뢰할 수 없는 자산 관리사에게 재산을 맡길 수 없듯,
사람은 하나님을 인생의 운전자 자리에서 밀어내고 직접 핸들을 잡기 원합니다.
더이상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끌려가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인간은 자신이 통제 가능한 상황으로 사건을 단속하고 관리하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특별한 계획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배신을 당할 때, 믿음에도 불구하고 기근을 만날 때,
하나님이 내 생각과 다르게 일하실 때를 대비한 계획입니다.
이런 계획은 계획이라기보다 계략이나 계책이고 묘책이자 비책입니다.
아브람의 계략이 그러했습니다.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기게 될까 봐 그는 남편이 아니라 오빠가 되기로 합니다.
실제로도 사래는 아브람의 이복 누이이니 없는 말을 지어내는 거짓말은 아닙니다.
오빠로서 혼담의 결정권자가 되면, 아내도 빼앗기지 않게 되고,
무엇보다 오고 가는 결혼 이야기 속에서 생기는 우호적인 인간관계의 실리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군대에서 예쁜 여자친구 사진을 간물대에 붙여놓으면 군생활이 힘들어지지만,
예쁜 여동생 사진을 간물대에 붙여놓으면 군 생활이 편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아브람의 생각에 이는 기가 막힌 비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배제한 사고’로 구조화된 인간의 꼼수를 여지없이 허물어버리십니다.
혼담의 결정권자로서 충분히 상황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 자신한 아브람의 계획은 바로에 의해 무너지고 맙니다.
불가항력적으로 아내를 빼앗기고서야 아브람은 자신의 지혜와 힘과 노력과 그 어떤 꼼수와 시도로도 인생을 통제할 수 없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회심의 비책을 준비했던 아브람은 이후 어떤 행동이나 대사 한 줄 기록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예상치 못하게 전개되는 상황 앞에서 그는 전적으로 무능력했습니다. 

전적으로 무능한 아브람에게, 오직 ‘자손을 주시겠다’라고 약속하셨던 하나님만이 이 위기의 해결자가 되어주십니다.
아브람에게는 믿음에도 불구하고 기근을 만난 황망함이었겠지만,
하나님은 기근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그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믿음이 기근을 만나는 것은 나의 기대와 예상으로 하나님을 구조화하려는 마음 자체를 붕괴시키고
오로지 하나님만이 선하신 분이심을 신뢰하도록 만들어가시는 과정인 것입니다.
기근 앞에서야 우리는 믿고 싶은 대로 믿던 우리의 왜곡된 믿음을 떠나 하나님을 제대로 경험하고 알아가고 신뢰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신뢰하는 마음을 가르치시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