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산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옵니다.
“네 눈에 보이는 세상 모든 것을 다 너에게 주마.”
몇세기전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일과 꼭 같은 상황이 ‘아브라함의 자손’에게도 일어납니다.
그 옛날 하나님은 자신의 조카 롯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기로 결정한 아브라함에게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창13:14,15).”라고 약속하셨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약속 속의 주인공인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하나님의 그 약속을 떠올리게 하는 제안이 들어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그 제안을 한 당사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였습니다.
마귀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천하만국과 영광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 제안합니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고통당하지 않아도, 생명을 버리지 않아도, 희생하지 않아도, 경배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내어주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를 완강히 거부합니다.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후 자신의 백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게 됩니다.
그는 결국 생명을 포기하고 십자가의 길을 걷습니다.
영광을, 권위를, 체면을, 생명을 잃어 사랑하는 백성들을 얻으신 예수님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유하게 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신 모든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행하심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
‘아브라함의 자손’이 자신의 조상 아브라함을 닮아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행보를 살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이 자신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행보의 삶을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3장에서 롯을 위해 자신의 권리와 소유와 부요함을 포기한 아브라함의 모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만들어가십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 가운데에 있는 성도가 그 복을 받아 궁극적으로 어떤 삶의 모습을 살아내게 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보여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은 선택의 권리를 롯에게 이양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아브람은 선택을 하지 않는 결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방관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은 문제 해결을 위해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다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움직인 것은 아브람이었습니다.
문제 해결의 방법을 제안한 것도 아브람이었습니다.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만, 그가 결정한 것은 절대적 수용성이었습니다.
이런 행동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적극적 수동성?! 능동적 수동성?! 주도적 수용성?!
아브라함의 이 결정을 뭐라고 정의하여 부르던,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이렇게 주도적이면서 동시에 포용적이고,
적극적이면서 동시에 수용적이며, 능동적이면서 동시에 수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사자와 어린양이신 예수님처럼,
불안하고 위태로운 순간에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인생을 이끌어가시도록 사랑의 결단을 합니다.
세상의 논리와 원리로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삶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뿐인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부어주시는 복이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이끌어가시는지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내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