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4개국 동맹의 원정대가 소돔을 포함한 5개 도시로 진군해 내려왔습니다.
이는 12년간 조공을 바치며 섬기던 소돔 연합이 그돌라오멜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엘람 왕은 족히 2,500km 정도 되는 먼 길을 원정하여 동맹국들의 군대와 함께 소돔 연합을 공격합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병참입니다.
하지만 진군하는 그 오랜 시간 동안, 그 많은 군사가 먹을 식량을, 그 먼 거리에서 조달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고대에 원거리 전쟁은 언제나 물자를 현지에서 조달하고는 했습니다.
게다가 전쟁에 참여한 군사들의 급료 또한 전쟁에서의 전리품으로 충당되곤 했습니다.
그러니 동방 원정대가 행군하여 지나가는 자리는 마치 메뚜기떼가 지나가는 것과 같이 약탈과 수탈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많은 민족과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장식하며 요단 동편의 주요 거점들을 약탈하여 동방 원정대는 남하했습니다.
백번을 싸우면 백번을 이기는 군대가 요단 동편을 휩쓸고 싯딤 골짜기에서 드디어 소돔 연합군과 격돌했습니다.
역청 구더기와 같은 주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싸우려던 소돔 연합의 계획은 링 위에서 동방 원정대의 핵펀치에 모두 무너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요단 서편 헤브론의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거주하던 아브람은 다행히도 전쟁의 화마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사태를 관망했습니다.
아브람도 충분히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돔에서 도망쳐온 사람들에게서 아브람은 조카 롯의 소식을 듣습니다.
롯이 동방 원정대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대로 포로로 끌려간다면 롯과 그 가족들은 모두 노예가 되고 말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부족들과 도시들도 당해내지 못한 군대를 상대로 일개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전쟁이란 천재지변과 같다’고
‘인생은 원래 전쟁과 같다’고 여기며
눈 한번 질끈 감고 넘기는 수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동방 연합군을 추격하여 롯을 구출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318명의 가신들과, 동맹한 마므레 형제들과 함께 그돌라오멜을 쫓아 출격합니다.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은 318명입니다.
반면에 상대의 병력은 규모조차 파악이 안 됩니다.
아브람은 이길 가망성이 전혀 없는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명을 걸고 추격합니다.
여기엔 아브람의 생명만 걸린 것이 아닙니다.
318명에게 딸린 식구들까지 생각한다면 최소 1,200명의 생계와 생명을 거는 일생일대의 결정인 것입니다.
롯의 구출을 위해 세계 최강의 군대를 향하여 아브람은 최소 1,200명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왜 아브람은 이런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결정을 한 것일까요?
그것은 그 일이 아브람에게 생각하고 고심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즉각적으로 일어나 행동해야 했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소유 문제로 다투어 헤어지긴 했지만, 롯은 아브람의 조카입니다.
아브람은 요절한 그의 형제 하란을 대신하여 롯이 어렸을적 부터 아버지 역할을 대신해왔습니다.
아브람에게 롯은 아들과 같습니다.
아브람의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행동은 사랑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불 난 집에 갇힌 자녀를 위해 불 속으로 뛰어드는 아버지같이,
자녀가 물에 빠졌을 때 자신이 수영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고려하지 않고 뛰어드는 어머니같이,
아브람은 롯을 위하여 굳이 전쟁 속으로 뛰어듭니다.
사랑은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행동하게 합니다.
사랑은 동사입니다. 

그 사랑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달려내려 오셨습니다.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 올리시기 위해 정작 자신의 생명은 십자가에 걸었습니다.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거는 무모한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추격합니다.
그렇기에 믿음은 우리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