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갈의 인생은 여자로서 존중받아 본 적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원래 하갈은 비록 종이었어도 애굽의 궁녀였으니 그래도 좀 살만한 처지였을 테지만,
아브람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왔을 때, 하갈은 사래의 몸값으로 지급되어 물건처럼 소유권이 이전되었습니다.
수많은 짐승들과 함께 섞여 아브람에게 보내진 하갈에게 여자로서의 삶이나 존중은 없었습니다.
그 후 아브람이 사래를 되찾고 애굽을 떠날 때 덩달아 강제로 고향을 떠나게 되었고
이제 하갈은 사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하갈은 평생 누군가의 소유물이었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인생을 선택한 적이 없었습니다.
사래의 명령으로 아브람의 잠자리에 들어갈 때도 그랬습니다.
사랑의 감정은 고사하고 이 과정에서 하갈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덜컥 주인 할아버지의 아이를 임신했습니다.
한 번도 기대를 가져보지 못했던 하갈의 인생에서,
아브람의 아이를 임신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시작점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평생 처음 가져보는 희망에 하갈의 마음은 붕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달라진 마음가짐이 숨겨지지 못해 눈빛에서 흘러나오자,
분노에 사로잡힌 사래는 하갈의 현실을 깨닫게 만드는 학대를 시작했습니다.
비록 사랑의 관계는 아니었어도, 임신한 아이의 친부인 아브람은 여종을 여주인의 학대 속에 방치합니다.
희망이 없었을 적엔 상실감도 없었을 테지만,
이제 그 잠깐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자 하갈의 고통은 그제야 견딜 수 없는 무게로 실체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전과 달리 희망의 맛을 본 하갈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주도적 결정을 내립니다.
그것은 도망이었습니다.
하갈은 사래의 학대를 피하여,
그리고 무엇보다 아브람 부부에게 아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애굽을 향해 광야로 도망합니다.
사래의 학대에서 도망치던 하갈은 광야의 샘 곁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도망치던 하갈에게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약속을 감히 ‘내가’라고 말하며 여호와의 사자가 장담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듯,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여호와 하나님, 그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여호와의 사자를 가리켜 ‘장차 나타나심에 대한 위대한 서막’이라고 표현하며 성자 하나님의 현현이라고 설명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기구한 운명의 여인을 만나주신 것처럼,
여호와의 사자는 기다렸다는 듯 하갈을 광야의 샘 곁에서 만나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고 말합니다.
‘고통을 보셨다’고 하지 않고
시처럼 문예적으로 표현하여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청각적인 것은 시각적인 것보다 감정과 마음에 더 크게 영향을 주곤 합니다.
‘고통을 들으셨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하갈의 고통에 심정적으로 공감하신다는 표현입니다.
이는 멀리서 망원경으로 쳐다보는 무감각한 관찰자가 아니라, 라포와 공감으로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묘사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유창한 기도를 듣고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실이나 충성된 순종에 감동하여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을 듣고 오신 분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무너지고 고통의 무게에 언어의 구조도 붕괴하여 기도조차 나오지 않을 때,
주님은 우리의 목소리가 아닌 고통을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버림받은 것 같은 인생의 고통을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주님은 멀리서 관찰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곁에서 우리의 고통을 들으시고 우리의 아픈 마음을 아시고 공감하시며 찾아와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하갈은 애굽이 아니라 하나님께 도망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곁에서 우리의 아픔에 공감하시는 주님은 하갈에게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도망가야 할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