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지 1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간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시거나 특별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렇기에 13년이라는 침묵의 시간은 아브람에게 있어
사래의 기지와 아브람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시키고 복을 얻은 인생을 살게 되었노라 자부하며 지내온 착각의 세월이었고,
이스마엘이야말로 그렇게 얻어낸 약속의 자손이라 여기며 살아온 세월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 끝난 줄 알았던 이야기를 13년 만에 다시 꺼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연히 자손에 대한 약속을 다시 언급하신다는 것은,
13년 전 아브람 부부가 시도했던 일들이 결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고,
13년 전 얻게 된 아들 또한 약속의 자손이 아니었다는 말이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해내었다 여기고 살아온 13년의 세월이 헛되었던 것을 전제로 하시는 이야기였습니다.
모든 것은 13년 전으로 리셋되었습니다.
13년간 제자리 걸음을 걸었던 아브람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13년이 지나서야 아브람의 잘못을 밝히시는 것일까요?
13년간 하나님은 무엇을 기다리신 것일까요?
아브람에게 허용된 13년은 자신의 노력으로 몸부림치며 사는 것의 한계를 체감케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의 율법 아래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살아가려는 시도를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허용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찢어주심으로 구원을 얻게 되기까지,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이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폭로하시기까지, 오래참으신 허용입니다.
하지만 율법이 아닌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것이
율법 아래에서 인간적 노력으로 살던 자들을 버리신다는 뜻이 아님은,
인간적 노력의 결실인 이스마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할례를 받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인간적 공로 아래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지만 할례를 통해 은혜 아래로 들어간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태어나자마자 버려지지 않도록 그가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장차 베푸실 자비의 예표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제 13년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완전함을 요구하시며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십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사래는 사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소유와 통치의 의미가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 때에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높이려던 모습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직접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시며 그 이름을 창대하게 하십니다.
아브람의 13년간의 삶의 자세에도 불구하고, 그의 온전치 못한 삶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새롭게 하십니다.
새로운 이름으로 아브라함을 불러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직접 통치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선포와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영원한 증표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할례를 요구하십니다.
할례는 남성의 생식기 포피를 베어내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몸에 새기는 것입니다.
마취제도 없고 날카로운 칼을 만들 금속 기술도 부족하던 시절에,
생살의 살점을 잘라내는 할례는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었습니다.
99세의 아브라함에게 할례란 엄청난 육체적 고통만큼이나 뼈아픈 마음의 고통이 따라오는 일입니다.
착각과 오해와 곡해 속에서 보낸 지난 13년의 나날들이 부끄러움으로 가슴을 베어내는 고통입니다.
그것은 마음의 할례입니다.
하나님은 상한 마음을 찾으시는 분이시지요.
또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쫓는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13년의 시간을 정당화 하기 위해 주를 떠나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13년의 공로를 마음에서 베어내고 마음의 할례로 은혜의 백성이 되도록 이끌어주십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그날에 이스마엘을 포함한 모든 식솔들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아픈 마음으로 지난날과 결별하는 은혜를 주께서 우리에게도 주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