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천사 둘을 데리고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의 장막에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세 사람의 손님을 예사롭지 않게 여기고 극진하게 맞이하여 대접합니다.
아브라함이 “내 주여” 하고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으로 손님을 부르는 것을 보면,
아브라함은 이 세 사람이 하나님의 일행임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는 사라에게도 눈치를 주려는 듯 세 사람을 접대할 전병을 세 스아, 즉 22리터의 밀가루로 준비시킵니다.
22리터면 한 끼가 아니라 세 사람이서 족히 일주일도 먹을 수 있을 양입니다.
엄청난 양의 전병을 주문받고 사라는 분주해졌습니다.
버터와 우유와 소고기 요리로 손님들의 식사가 시작된 이후에도 사라는 부엌을 떠나지 못하고 손님들 근처의 장막에서 밀가루 반죽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년 이맘때에 자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겐 새로운 약속이 아닙니다.
이미 며칠 전 할례를 명하실 때도 하셨던 약속의 반복입니다.
25년 동안 주기적으로 하셨던 약속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장막에서 천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이 이야기를 들은 사라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저 지나가는 여행객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과 이 부부만 알고 있을 자녀에 대한 약속 이야기를 먼저 꺼낸다는 것은
이 사람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거나 아니면 하나님 바로 그분이시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상황에 사라는 당황했지만,
‘어차피 하나님은 또 내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만나러 온 것이이라’ 하는 생각과,
‘장막 천 뒤에 있으니 하나님의 시선에서도 자유롭다’는 생각에,
사라는 긴장하지 않고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만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라를 만나러 오신 것이었습니다.
사라는 그동안 아브라함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겐 관심이 없으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지 나를 대상으로 하신 약속은 아니라’고 생각하여,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들여보내기까지 했던 사라입니다.
사라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지 ‘나의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도 그 하나님의 시선은 나를 향하여 있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웃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라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남아있지 않고 사라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장막 뒤에 숨어있어도 가려지지 않음을 하나님은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속으로 웃음을 터뜨린 사라에게 하나님은 “뱃속으로 네가 웃었다” 고 지적하십니다.
이는 책망이 아닙니다.
사라의 마음속 깊이 뱃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애환의 감정을 확인하심입니다.
히브리인들은 마음이 장기에 있어서 감정이 배에서부터 올라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라의 웃음은 깊은 내면의 감정에서부터 흘러나온 애환의 웃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라의 탄식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에겐 더이상 즐거움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즐거움이란 히브리어 단어 ‘에덴’은 남녀 간의 사랑에서 나오는 환희의 기쁨을 말합니다.
즉 사라는 아브라함과의 관계에서도 사랑을 잃은 지 오래였습니다.
‘남편이 나를 건드리지도 않는데 어떻게 임신을 할 수 있겠느냐’는 자조 섞인 웃음이었던 것입니다.
즐거움을 잃은 사라는 자신을 늙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면한 사라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새로워졌습니다.
세상은 다시 경이로워 보이고, 아브라함과의 사랑도 새로워졌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의 사이에서 드디어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내가 내년 이맘때에 돌아오겠노라”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사라에게 웃음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시기에 앞서 사람을 먼저 바꾸십니다.
기대감 없던 우리의 낡은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다른 누군가를 통해 하나님을 전해 들어 아는 것에 만족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직접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즐거움이 새로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