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인 아브라함은 목초지의 상황에 따라 이동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간 헤브론이라는 곳에서 오랜 세월 거주했지만,
이제는 그 땅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더 넓은 목초지를 찾아 떠나야 했습니다.
산지와 광야를 벗어나 평야의 목초지로 이동하면 좋기야 하겠지만,
아브라함에게 살기 좋은 곳이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살기 좋은 곳임은 뻔하지요.
아브라함이 이주하기로 한 ‘그랄’은 이미 블레셋 사람들이 거주하는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식솔은 20년 전에 이미 남자만 318명이었으니 이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함께였을 것입니다.
가신들의 가족들까지 계산한다면 아무리 작게 잡아도 이천 명 이상의 무리임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작은 도시 하나가 통째로 이동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블레셋의 그랄 왕 아비멜렉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이건 거대한 두 세력의 부딪힘에 해당하는 중대한 사안이므로
두 세력의 부딪힘에서 발생할 스파크로 인해 엄청난 긴장감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대한 두 세력의 부딪힘은 언제나 전쟁으로 해결을 보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긴장감으로 자신을 예의주시하고 있을 아비멜렉과 화평하게 지내기를 바란다면
그는 아비멜렉과 반드시 동맹을 맺어야만 했습니다.
그 시절 동맹이란 확실한 위아래 관계에서 조공을 바치는 관계가 되든가,
아니면 그보다 확실한 방법으로서 정략결혼을 맺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정략결혼이란, 말이 좋아 혼인이지 여차하면 언제든 포로가 될 인질을 볼모로 데려가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아내라고 밝히지 못하고 누이라고 말하고선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결국 빼앗기고 맙니다.
그렇다고 전쟁을 선택하기엔 아브라함은 겁이 많았습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아내를 잃은 아브라함의 모습은 무능하고 비겁하고 치졸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모습은 25년 전 애굽에서 사라를 바로에게 빼앗겼을 때와 비교해보았을 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입니다.
25년의 시간 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신앙을 성장 시켜 왔습니다.
그간 하나님은 애굽에서 사라를 되찾아주셨고,
횃불로 언약도 맺어주셨고,
밤하늘의 별도 함께 바라보셨고,
동방 연합군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하게 하셨고,
멜기세댁으로서 함께 식사도 하셨고,
그의 이름도 바꿔주셨고,
할례도 받게 하셨고,
소돔과 고모라를 두고 논쟁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25년 전의 아브라함과는 다른 사람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모습은 2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원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죄악을 막으시려 꿈속에서 경고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소개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영광스러운 자리에서가 아니라 이런 실망스러운 상황에서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부르시는 걸까요?
25년을 기다려온 약속의 성취를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왜 이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 두셨을까요?
아비멜렉의 범죄는 꿈을 통해서라도 막아주신 하나님이 왜 아브라함의 실패는 그냥 방치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아비멜렉 사건을 이유로, 장차 태어날 이삭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간 아비멜렉의 집에 모든 태를 닫아오셨습니다.
아비멜렉의 집은 선지자 아브라함의 기도로 치료되기 전까지 그 대에서 끝나버리는 죽음의 가문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아무도 이삭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의혹을 던지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로 보아 하나님께서는 굉장히 오래전부터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이 사건을 준비해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아브라함일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한 커풀 벗겨내면 그저 연약하고 무능한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이 정도면 되었겠지!’ 싶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민낯을 드러내십니다.
25년의 시간은 아브라함을 복 받기 합당한 사람으로 준비시켜온 시간이 아니라,
25년이 지나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에 불과함을 증명하시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이에게 빼앗기지 않습니다.
자격 없는 이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 그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달아 알게 된 사람,
그 사람이 선지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도 이제 이 정도면 되었지!’ 하고 자평하는 우리에게,
우리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걷어지면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신앙생활을 10년을 해도 20년을 해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갈구하고 소망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선지자로 우릴 부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