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마엘은 울고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태양의 열기를 한 뼘이라도 피해 보려고, 얼기설기 엉켜있는 덤불 아래,
그늘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그 나무 아래에 드러누워 이스마엘은 울먹이고 있습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좋은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이스마엘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광야 한가운데에서 내리쬐는 땡볕 아래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쫓겨날 때 가지고 나온 물 한 가죽 부대는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입니다.
어머니와 아들은 살아서 광야를 탈출할 희망을 버렸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이스마엘의 눈에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릅니다.
어머니인 하갈도 아들의 생명을 포기한 채 화살 한바탕 거리에서 넋을 놓고 앉아 울고 있습니다.
서로의 울음소리는 거리상 들리지 않지만,
죽어가는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갈과 이스마엘은 복받쳐 올라오는 절망을 억누르지 못해 울고 있습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스마엘은 약속의 아들이었습니다.
모두에게서 이쁨과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아들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아버지와 함께했던 추억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로서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을 때도, 이스마엘은 아버지와 함께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스마엘은 자신도 틀림없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숨길 수 없는 증거를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태어난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비록 자신이 약속의 아들이 아니라 할지라도 아버지가 자신을 이렇게 버릴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어금니 사이로 자신을 버린 아버지와 자신을 버리라고 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절망의 깊이 만큼 짙은 신음소리로 새어 나옵니다.
“아버지, 대체 왜 나를 버렸나요? 이렇게 비참하게 죽도록 나를 내다 버려야만 했나요?
하나님, 내가 이런 곳에서 이렇게 죽어야 한다면 도대체 왜 나를 태어나게 한 것인가요?”
그가 절망하며 죽어가는 순간,
이스마엘의 신음소리를 하나님의 사자는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하갈의 눈을 밝혀 샘물을 찾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마엘이 약속의 아들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이스마엘이 의롭고 탁월하기 때문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마엘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죽어가는 이스마엘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마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던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이 부르짖는 외침은 오히려 듣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하고 신음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외치신 마지막 이 절규에서 우리는 이스마엘의 모습을 겹쳐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부르짖음은 들으셨고, 정작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가며 외친 부르짖음은 외면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레위기 16장을 보면,
속죄일에 염소 두 마리를 제비 뽑아 한 마리는 속죄제로 드리고, 다른 한 마리를 광야로 내모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죄를 속량하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것은 죄인을 대신하여 죄 없는 다른 누군가가 버림받는 방법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이유는 이스마엘 대신에 자신의 아들을 버리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약속의 아들이 아니었으나, 여전히 그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
하나님은 약속한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시고, 그 대신에 이스마엘을 구원하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기 위해 대신 아들의 부르짖음은 외면하셨습니다.
그가 버림받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을 광야로 보내게 하신 것은 이스마엘을 버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버려 우리를 얻으려 하심입니다.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에게도 아들을 버리는 것이 쉬웠을 리 없습니다.
18년 이상을 키워온 아들을 무일푼의 빈손으로 내쫓는 것보다,
두둑이 한몫 챙겨 독립시키는 것이 아브라함에게는 훨씬 손쉬운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광야를 벗어날 수 있는 충분한 식량이나 물조차 내어주지 못하고 아들을 광야로 내몰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마엘을 지키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함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아들을 버려야만 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아브라함에게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 대신 아픈 마음으로 그 아들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찢어 얻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마음을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