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멜렉은 군대장관 비골을 대동하고 나타나 아브라함에게 공식적인 동맹의 맹세를 요청합니다.
아비멜렉의 가문은 태의 문이 열린 지 이제 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의 아들은 이제 갓 4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텐데도
그는 자신의 손자 시대까지 언급하며 서로 간에 영원한 인애의 맹세를 맺자고 요청합니다.
그는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날이 갈수록 형통하는 아브라함에 편승하여 이익을 함께 누리려 합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두려워하기보다 컨트롤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나날이 세력이 커져가는 아브라함의 성장세를 두려워했다면 동맹이 아니라 전쟁과 기습으로 애초에 싹을 밟아놓으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아브라함을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은 누가 보아도 아브라함의 잘못이 명백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편을 들어주시며 자신에게 꿈을 통해 경고하셨던 5년 전의 사건을 잊지 않았습니다.
아비멜렉에게있어 아브라함은 진실의 일부만을 선택적으로 이야기하는 거짓말쟁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를 요청할 때도 그에게 진실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아비멜렉이 볼 때, 자신보다 부도덕하고 부족한 자질과 소양에도 승승장구하는 아브라함이 이상해 보였지만,
분명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앞으로도 아브라함이 무슨 일을 하든 아브라함 편을 들어주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아비멜렉은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하나님을 적으로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하는 일마다 형통하는 아브라함과 맹세를 맺어 아브라함이 형통할수록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는 관계, 서로가 윈윈하는 그런 시스템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아비멜렉의 눈에 비친 아브라함은 분명 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형통의 흐름을 타고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미래를 준비하고 계획하는 부분에서 볼 때, 그리고 리스크 관리라는 측면에서 볼 때, 확실히 아비멜렉은 지혜로운 모습을 보입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이용하려 합니다.
아니, 사실 아비멜렉이 이용하고 싶은 것은 아브라함이라기보단 아브라함의 뒤에 있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비멜렉에게 있어 하나님은 리스크 관리를 못 하면 위협이 되지만, 반대로 리스크 관리를 잘하면 오히려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아브라함이 지난번처럼 거짓말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고 아비멜렉은 전망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비멜렉만큼 지혜롭게 살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부와 명예와 성공과 형통함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이용하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편에 서고 싶어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하나님이 주실 부와 명예와 형통함과 성공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함은 아니라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것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용하고자 함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형통함에 편승하고 싶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관리하려 합니다.
이는 매우 지혜로워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세상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은 눅16:8에서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씀하셨었습니다.
아비멜렉이 보기에 아브라함은 하나님 덕분에 형통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보였으나,
사실 하나님의 사람인 아브라함의 삶은 아비멜렉이 보는 겉모습과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형통할 것만 같았던 아브라함은 사실 우물 하나 지키지 못하고 빼앗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물은 당시를 살아가는 유목민에에게 있어 생활의 필수 요건이자 가장 큰 재산입니다.
우물은 삶과 삶의 이권이 부딪히는 최전선입니다.
분명 우물을 판 것은 아브라함인데, 아브라함은 우물의 사용권에서 늘 밀렸습니다.
지킬 힘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브라함은 빼앗으려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빼앗기는 삶을 선택하며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기 위하여 삶에서 수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빼앗기고 살아가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의 삶이란 예수님처럼 빼앗기고 손해 보는 듯한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형통이 있습니다.
죽어야 살게 되고 져야만 승리하는 놀랍고 영원한 신비.
영원하신 하나님의 그 신비함이 바로 형통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