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더위를 피해 시원한 곳을 찾고, 감당하기 버거운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피할 곳을 찾습니다.
그러나 결코 피할 수 없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과 임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 앞에서 숨을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하나님의 선지자 요나는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도망치려 합니다.
요나는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저버리고 소명의 정반대 방향, 세상 끝 다시스를 향해 배에 오릅니다.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악독함에 대항해 선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인생을 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그 명령을 거역하려는 충격적인 선지자의 모습으로 요나서는 시작됩니다.
도대체 그는 왜 도망을 쳤을까요?
단지 니느웨가 크고 악하며 위험한 도시였기 때문일까?!
물론 니느웨는 잔혹한 앗수르의 핵심 도시였고,
그 도시의 악독함이 하나님께 상달될 정도였으니 소돔과 고모라 못지 않은 악하고 위험한 도시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요나의 도피는 그의 죽음조차 불사한 결연한 각오의 행동이었던 점을 보았을 때,
그의 도피 이면에는 단순히 어려움이나 위험을 피하려는 것 이상의, 훨씬 깊고 근본적인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정말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선지자를 보내 경고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선지자는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목적으로 할 때 보내지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는 그간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만을 향해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방에게 선지자를 보내어 심판을 경고하신 전례가 없습니다.
이방의 심판에 대해서 계시하실 때조차 그 소식의 대상은 언제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방의 심판이 이스라엘의 구원이기에 하나님의 선지자는 언제나 구원의 대상을 위하여 보내졌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고 선지자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자신을 보내시는 이유가,
그 악독한 앗수르 백성에게 회개하고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구원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요나는 그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앗수르는 장차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무서운 도구로 예언된 적대국이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앗수르 사용 계획을 상기해 볼 때,
요나는 이스라엘을 위해서라면 니느웨가 심판 받아 국력이 쇠약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강성해져서 이스라엘에 위협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니느웨를 구원하시고자하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계획이 자신의 생각과 민족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는 그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분의 계획을 신뢰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요나는 앗수르를 통해 행하실 하나님의 일들이 결국 이스라엘을 위한 일이 될것임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는 옳고 그름의 기준을 하나님이 아닌 스스로에게 두고,
하나님의 명령이라도 ‘내 생각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때만’, ‘나에게 유익이 될 때만’ 순종하겠다는 조건적인 순종의 태도를 보입니다.
조건적인 순종은 하나님과의 협상일 뿐, 진정한 순종이 아닙니다.
이유가 타당하면 순종하겠다는 발상은, 사실 그 ‘이유’야말로 내 본성이 간절히 원하는 진정한 목적의 우상 숭배입니다.
죄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판단하며,
하나님보다 다른 것 즉 민족이나 자아의 의로움 등을 더 사랑하는 우상숭배야말로 죄의 본질이자 핵심입니다.
애국적 결단처럼 보이는 요나의 행동은 사실 자신의 생각과 자기 민족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우상숭배였습니다.

우리도 요나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방법은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도망치는 순간에도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들이 주의 얼굴을 피해 달아나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죄인들은 하나님 얼굴을 피하지 못하고 그 얼굴의 공의를 견디지 못하여 소멸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선하신 계획은
악독한 니느웨뿐 아니라 패악한 요나를 향해서도 그리고 죄악된 우리를 향해서까지 동일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분의 공의로운 심판 아래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사랑과 은혜로써 우리를 돌이켜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고, 하나님과 협상하며, 자신의 우상을 섬겼던
우리의 죄된 옛 자아를 그리스도 안에서 죽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처럼,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죽었던 심령을 다시 살려내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난 사람들은 더 이상 계산적이거나 조건적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순종하고,
그분의 마음을 알기에 순종하며,
그분의 자비가 자격 없는 우리에게 어떻게 임했는지를 깨닫기 때문에,
그의 선하심을 신뢰하기에 순종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알려 주실꺼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