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왕 파라오는 히브리 민족의 번성을 두려워한 나머지, 십브라와 부아라는 산파들에게 끔찍한 명령을 은밀히 내렸습니다.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죽이고, 여자 아기만 살려두라.”
생명의 탄생을 돕는 거룩한 사명을 가진 산파들에게 죽음의 도구가 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로 부리는 절대권력자인 파라오의 명령은 산파들에게 있어 협박에 가까웠습니다.
거절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명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녀들이 거절한다 하더라도 파라오는 얼마든지 자신들이 아닌 다른 인물들에게 명령하여 그 악랄한 계획을 충분히 진행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두 산파는 왕의 명령을 받아 놓고서는 대담하게도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명확히 기록합니다.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아기들을 살렸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다’는 말은 단순한 공포가 아닌 경외함, 즉 가장 높은 분께 드리는 존경과 순종을 의미합니다.
산파들이 파라오의 권력과 폭력을 무서워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더 큰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곧 경외심입니다.
참됨을 향한 두려움이 악을 향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산파들을 행동하게 했습니다.
용기란 무엇일까요?!
용기란 무서움이 없는 상태, 두려움을 모르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하룻 강아지가 범을 무서워 하지 않는 것을 용기라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용기란 오히려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더 큰 가치를 지키기 위해, 사랑하고 아끼는 대상들을 지키기 위해
의로움을 향한 타는 마음이 악독함 앞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합니다.
두려움이 두려움을 이겨내게 합니다.

그렇다면 산파들은 어떻게 남자 아기들을 살렸을까요?
서슬퍼런 파라오의 추궁에 산파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히브리 여인들은 건장해서 산파가 도착하기 전에 해산합니다.”
이 말은 궁지에 몰린 산파들이 둘러댄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산파들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백성들을 지켜내셨는지를 고백하는 진술이었습니다.
산파들이 산모의 집에 들어가면 출산을 돕게 될 확률은 50%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50%는 살인을 저질러야 합니다.
하지만 산파들이 산모의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아기의 생명과 산모의 건강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맡기게 됩니다.
산파들은 자신들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아기들을 맡기는 방법으로써,
사악한 명령에 가장 소극적인 방법으로 대응하여 가장 적극적인 저항을 시행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강하게 하셨다고, 그들의 집을 세우셨다고 기록합니다.
‘강하게 하셨다’, ‘그들의 집’을 세우셨다고 할 때에 사용된 단어들은,
하나같이 여성 복수형이 아니라 남성 복수형이 사용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산파들이 아니라, 남자 아기들을 강하게 하시고 그들의 가정을 세우셨다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파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의도적인 늦장 대응과 지연 출발 등으로써,
남자 아기들을 죽이라는 파라오의 악독한 명령을 시행하지 않고 도리어 아기들을 살린 것입니다.
산파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대하는 믿음으로 생명의 탄생과 민족의 미래를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세상의 악한 명령에 ‘덜 충성’함으로써 하나님께 ‘더 큰 충성’을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지혜로운 순종이었습니다.

산파들은 거짓말로 때우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진실의 일부를 진술하는 것과 사실과 다른 내용을 지어내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거짓말은 손쉬운 문제 해결방법입니다.
그래서 유혹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손쉬운 방법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가 필요합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결단과 실행에 대하여 언제나 신중히 고려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거짓말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겐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도 결과만큼 중요합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목적을 위한 수단 역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품과 일치하는 순전한 길을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거짓이 아닌 길을 선택하는 수고로움도 결국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행동은 무엇을 더 두려워하는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말로는 누구나 옳은 일들에 대해 떠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선택의 순간, 우리는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을 위해 움직이게 됩니다.
우리의 결단과 실행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두려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증명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의 헌금 생활이 신앙고백이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주일 성수가, 정직함이 신앙고백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삶의 행동들이 우리가 무엇을 더 두려워하며 사는지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산파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참된 경외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고 말입니다.
더 큰 두려움이 더 큰 용기를 만든다고 말입니다.
파라오의 이름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을만큼 하나님이 관심조차 두지 않으셨지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순종한 산파 십브라와 부아의 이름은 영원히 기록되었습니다.
그녀들의 이름 뜻대로 아름답게 반짝이는 이름으로 성경에 새겨졌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마땅히 두려워할 바를 두려워할 줄 아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하여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