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0편에서 다윗은 절망적인 고백을 토로합니다.
“나의 죄악이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니…”
이때 사용된 히브리어 ‘아참’은 단순히 양이 많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강하다’는 뜻으로, 수가 많아 강력한 상태를 뜻합니다.
머리카락도 한 올일 때는 끊어지기 쉬우나 땋은 머리는 끊어지지 않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죄악도 그저 숫자만 많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악은 우리를 완전히 무력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머리털보다 많은 죄악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절망적 상황을 생생히 보여줍니다.
강성해진 죄악은 우리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미끄러운 진흙 속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벗어나려고 몸부림칠수록 더욱 깊이 빠져드는 늪 같은 현실이 바로 죄악 속의 우리 모습입니다.
이 죄악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가 단단한 바닥을 밟지 못하고 허덕이는 실존적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 절망적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셨다는 것입니다.
시편 40편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한 구원의 비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라고 번역된 부분은 원문으로는 “주께서 내 귀를 뚫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자원하여 종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의 귀를 뚫는 율법 조항을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순종이었고, 그리스도께서는 자원하여 순종의 종이 되셨습니다.
7절에서 “내가 왔나이다”라고 선언하신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순종을 하러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순종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죄책이 가득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임 당하셨고,
의로움이 없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루마리에 기록된 율법을 대신 순종하셔서 율법이 약속한 의로움을 쟁취하셨습니다.
그의 행하신 순종과 죽임 당하신 순종은 모두 우리를 죄악의 수렁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자원하여 이루신 순종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머리털보다 많은 죄악을 완전히 뒤바꾸어 버린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불순종을 대신하고, 그분의 의로움이 우리의 죄악을 덮어버린 것입니다.
5절에서 “너무 많다”고 번역된 단어 역시 12절의 “머리털보다 많은” 죄악을 표현할 때 사용된 ‘아참’과 같은 단어입니다.
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악이 머리털보다 많고 강했을지라도 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더 정확히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결과가 셀 수 없을 정도로 강성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출1:7, 20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하여 강성해진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고 강성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40편에 반복적으로 “많은 사람, 많은 회중”이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한 사람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 많은 사람이 구원받고, 그들이 하나님의 강성한 백성이 되어 함께 찬양하는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 속에 포함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입어 강성해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시편 40편의 풍경입니다.
그렇기에 3절에서 언급되는 “새노래”는 단순히 새로운 가사나 새로운 장르의 곡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구속사의 비밀을 깨달아 부르는 노래, 즉 새언약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10절에서 “심중에 숨기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 심중에 있는 것은 바로 8절에서 이미 언급한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새노래는 성경 밖의 새로운 논리나 감성을 만들어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율법에 순종하신 예수님에 대한 노래, 그분이 행하신 구속사를 묵상하고 찬양하는 새언약의 노래입니다.
새노래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부르는 노래여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순종이 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새노래는 순종의 삶으로, 주께 드리는 산 제사로 드려져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은 허공에 대고 하는 허무한 외침이 아닙니다.
이미 십자가 위에서 “주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라고 부르짖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응답된 순종 안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죄를 자기 것으로 삼으시고,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서 지체하지 않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이러한 실체가 있습니다.
이미 이루신 순종이 있고, 결과가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실체가 있는 것을 두고 기도하고 부르짖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감사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바로 그 확실한 사랑 위에 신뢰를 걸고 의지하며 부르짖습니다.
그러므로 우울할 때, 원망될 때, 두려울 때, 불안할 때, 괴로울 때, 실패할 때,
인생의 시끄러운 웅덩이와 미끄러운 진창 속에 빠졌을 때,
가장 확실한 일인 주의 은혜를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딛어야 할 확실한 반석이 되어주십니다.
세상 그 무엇이 주님의 사랑보다 확실한 실체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새언약의 사랑을 반석으로 딛고 새노래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머리털보다 많은 죄악에서 구원받은 우리가 마땅히 불러야 할 감사와 찬양의 새노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