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합니다.”
모세는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언어능력에 대해 자신 없음을 표출합니다.
‘뻣뻣하다, 둔하다’고 번역된 히브리어 ‘카베드’는 원래 ‘비둔하다’는 뜻으로,
모세는 자신의 혀가 뚱뚱해서 민첩하지 못하다고 표현합니다.
모세는 스무 살 즈음부터 애굽 왕실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40세에 이집트를 떠나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40년이 넘게, 무려 60여 년 가까이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을 테니,
히브리어는 그에게 어색한 언어가 되어 있었습니다.
말을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을 구사하기 위해 집중을 하는 동안
상황과 환경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순발력과 명확한 표현력이 많이 부족해졌다고 느꼈을 겁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엄살을 들으시곤 말 잘하는 아론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보낼만한 자를 보내시라며 몸을 사립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콧김이 뜨겁게 끓어올랐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고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에서 노하기를 더디 한다는 표현은, 문자적으로는 ‘긴 콧구멍들’이라는 뜻입니다.
화가 나서 콧김이 끓어올라도 그 김이 긴 코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는다는 참으로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예수님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망설임을 모두 세어보아도 일곱 번이 되지 않습니다.
“누가 저를 믿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라고 해야합니까?”
“그래도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요?”
“저는 말을 잘 못합니다.”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은커녕, 다섯 번만에 하나님의 콧김이 뜨겁게 끓어오른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콧김을 끓어 올린 이유가 모세의 반복된 망설임이나 거부 때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상대로 콧김을 끓어 올리신 것일까요?
그것은 모세의 마지막 요청에 숨어 있습니다.
모세의 요청을 히브리어 표현대로 직역하자면 “보낼 만한 자의 손을 보내소서”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손’입니다.
모세는 이 일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말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미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바로가 너희를 보내주지 아니하리라.”
그렇기에 모세는 강한 손과 능력을 가진 자를 보내시라고 요청한 겁니다.
사람 중에 그런 완전한 권능의 손을 가진 자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모세는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구원이 목적이시라면 메시아의 손을 지금 직접 보내시면 됩니다.
왜 굳이 불완전한 저를 거쳐서 비효율적으로 일하십니까?”
바로 이 지적에 하나님은 콧김을 끓어 올리셨습니다.
모세의 지적 자체를 하나님이 동의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걸 내가 모르겠냐? 구원이 목적이라면 굳이 너를 보낼 이유가 없겠지,
너를 보낸다는 것은 나의 궁극적인 목적이 단순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야!
그러니 너는 진짜 내 목적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해.
그래서 나는 너에게 아론을 보내는 거야”
출애굽기 4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놀라운 대조 구조를 발견하게 됩니다.
일과 말, 손과 입, 모세와 아론, 하나님과 선지자가 계속 대비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일을 손으로 행하고,
아론은 그 일을 입으로 설명합니다.
이 모든 문예적 대조를 통해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계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론을 보내심으로써 드러내고자 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계시였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구원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선지자를 통해 드러내심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또 모세에게 아론을 보내셨습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보이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에서 인간을 구원하신 것도 사실은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목적을 회복하시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계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주된 목적 역시 바로 계시입니다.
교회인 우리를 보면 하나님이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론을 보내주셨습니다.
모세 혼자 모든 일을 감당하도록 그의 능력을 끌어올리신 것이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함께 사역할 동역자를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
형제가 연합하며 사랑으로 서로를 채우고 돕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드러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주의와 효율주의로 운영되지 않습니다.
비효율적으로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으로 운영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연약함은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당신의 강하심을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구원이 아닙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목적은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진짜 목적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원하셨던 것입니다.
완벽한 웅변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자신과 아론의 협력을 통해 완전한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교회로 부름 받은 연약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강하심과 사랑과 영광을 드러내실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