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는 바로에게 백성들과 광야로 사흘길 가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오히려 그 일로 노동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모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마음의 상함과 고된 노동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경은 마음의 상함을 외부적 고난보다 먼저 언급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상함은 고된 노동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마음의 상함’은 대부분 ‘낙심’이나 ‘절망’으로 번역되지만, 이것은 적절한 번역이 아닙니다.
마음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 혹은 호흡이라는 뜻입니다.
직역하자면 ‘호흡의 짧음’입니다.
마음 상태를 표현하려 했다면 마음이란 뜻의 ‘레바브’나 영혼이란 뜻의 ‘네페쉬’를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니 ‘루아흐’의 사용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던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짧은 호흡’ 때문이었습니다.
짧은 호흡이란 생명 유지를 위한 호흡의 딸림, 곧 활력의 결핍입니다.
부족한 내면의 힘으로 인한 영적 실행 역량의 고갈 상태, 즉 영적 무능력을 말합니다.
풀어 설명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만한 내면의 능력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모세 역시 자신의 한계를 고백했습니다.
“나는 입이 둔한 자”라는 표현은 말을 더듬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할례 받지 못한 입술’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은 영적으로 구별되지 못한 언어의 근본적 한계를 뜻합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인간의 언어로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한계 말입니다.
모세의 걱정은 실로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진리를 바르게 표현하는 데 애초부터 한계가 있다면,
어떻게 진리이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올바르게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그 누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있으며, 그 누가 진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부족한 지식과 오해가 전달된다면, 결국 아무도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전하는 이도 온전히 설명할 수 없고,
듣는 이도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여 받아들일 능력이 없다면
이것은 총체적 난국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 두 가지 근본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십니다.
바로 아론이었습니다.
성경 이야기의 흐름을 찢고 갑자기 등장한 아론 가문의 족보는
문학적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를 담아놓은 설계도였습니다.
이 족보를 자세히 살펴보면 놀라운 패턴이 발견됩니다.
나이가 공개된 인물 3명, 아내가 소개된 인물 3명,
나이가 기록된 인물들을 기준으로 수평적 관계의 형제를 3명씩,
수직적 관계의 자손을 3대씩,
아내와의 깊은 관계를 보여주는 직계 가족 3명의 족보가 소개됩니다.
이는 분명히 3이라는 숫자를 기준으로하여 수직 3, 수평 3, 깊이 3, 즉 3×3×3의 구조를 의도적으로 조직화하고 있습니다.
즉 아론의 족보는 의도적으로 정육면체 구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육면체에 대한 성경의 설명은 매우 특별합니다.
성막의 지성소,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 또한 훗날 도래하게 될 새 예루살렘이 모두 높이와 너비와 깊이가 동일한 정육면체 구조입니다.
즉 정육면체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완전한 공간의 상징입니다.
아론의 족보가 정육면체 구조라는 것은, 아론이 단순한 대언자가 아니라 신적 존재의 임재를 예표한다는 뜻입니다.
출7:1은 이를 확증합니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선지자가 되리라.”
아론은 하나님을 계시하여 드러낼 선지자이면서 또한 동시에 또 다른 신적 존재의 임재,
곧 거룩한 바람(루아흐)인 성령을 예표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고 제대로 듣고 믿을 수 없는,
언어의 한계와 인식의 한계의 문제를 모두 극복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언어의 한계가 계시의 한계가 되지 않도록 직접 인간에게 감동하셔서 진리를 계시하셨습니다.
마치 맨눈으로 볼 수 없는 태양을 색유리로 가려 바라보듯,
유한한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할 수 있도록 가리우시는 방법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렇게 주신 계시가 성경입니다.
또한 성령은 인간을 조명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을 수 있도록 능력을 채우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2000년 전 갈보리 십자가로 데려가시고,
그리스도의 인성에 연합시킴으로써 십자가라는 객관적 역사적 사건에 주관적으로 참여하는 체험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때 우리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던 진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삼위일체가 믿어지고, 예정이 사랑으로 다가오고, 십자가가 내 인생 모두를 투자할 보물로 보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가게 하십니다.
이를 위해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각각 성전이 됩니다.
족보가 지성소를 의도적으로 건설해 보여주었듯, 이제 우리는 지성소로 건설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높이와 너비와 깊이를 입체적으로 깨달아 알게 하시는 성령이 거하실 정육면체 성전입니다.
말씀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닙니다.
성령의 임재입니다.
할례받지 못한 입술을 거룩하게 하시고, 짧아진 호흡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식이 아닌 삶이 되고,
복음이 정보가 아닌 능력이 되도록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성전으로 만들어가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