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위급한 순간에는 간절히 기도하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우리의 모습과도 닮았습니다.
출애굽기 9장의 우박 재앙은 바로 이 문제를 정교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 번째 재앙을 내리시기 전에 특별한 말씀을 하셨는데, ‘이번에는’이라는 표현이 눈에 띕니다.
히브리어로 그 문장을 살펴보면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네 마음에 내리리라” 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치시려고 하신 목표는 바로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 또한 구약성경에서 주로 전염병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번엔 특별히 네 마음에 질병을 내리겠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우박은 질병이 아닙니다.
메뚜기도, 흑암도 질병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전염병’이라는 뜻의 단어로 재앙을 내리겠다고 하셨을까요?
이로 보아 하나님이 내리시겠다고 한 질병은 우박 자체가 아니라,
우박이 가져온 결과였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재앙이 시작되자 하늘에서 우박과 함께 불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이는 창세기 19장에 등장하는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연상시키는 광경입니다.
우박으로 말미암아 보리와 삼이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삼은 린넨과 같은 옷감을 만드는 식물입니다.
그러니까 식량과 함께 옷감의 재료까지 모두 파괴되어 버린 것입니다.
게다가 집 지붕을 두들기는 우박 소리는
피난처라 여겼던 집마저 얼마 버티지 못하고 파괴될 것만 같은 공포를 일으켰습니다.
어느 정도로 공포스러운 소리였는지 바로가 재앙을 그치게 해달라고 요청할 때
우박보다 소리를 먼저 언급할 정도였습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과 우박에 의해 의식주 전체가 타격 받는 것을 쳐다보며
유사 심판의 한 복판을 체험하고 있는 애굽 사람들의 마음은
‘이제 우리는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어디서 살 것인가?’하는 존재적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발원한 병리적 불안과 두려움,
이것이 하나님께서 내리시겠다고 하신 ‘마음의 병’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공포 앞에서 사람들이 보인 반응입니다.
일부 신하들은 우박이 내리기 전부터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여 모세의 경고만으로도 가축을 피신시켰습니다.
드디어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변화의 조짐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바로의 고백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범죄 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는 실토입니다.
이는 완벽한 회개의 정석입니다.
그러나 충격적 이게도 재앙이 그치자 바로의 마음은 다시 돌아섰습니다.
성경은 바로가 다시 범죄 하였으며 그와 그의 신하들의 마음이 꼭 같았다고 진술합니다.
순종하는 것처럼 보였던 신하들도, 회개하는 것처럼 보였던 바로도, 결국 본질은 똑같았다는 성경의 평가입니다.
결국 유사 심판을 경험한 그들의 공포심은 순전한 믿음의 행실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들의 회심이 진심이 아님을 모세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왕과 왕의 신하들이 아직도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우박을 그치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저 밀과 보리의 손실이었습니다.
바로는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동원합니다.
성경은 바로의 이러한 행위를 ‘교만’이라고 부릅니다.
17절에서 “교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스스로를 쌓아 올리다”, “길을 만들다”는 뜻입니다.
바로는 하나님께 항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활로를 확보하려 했습니다.
밀과 쌀보리가 남은 것을 보고는 아직 살 길이 있다고 판단하며 생존 전략을 짠 것입니다.
그의 회개는 항복이 아니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전술이었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을 동기로 하는 회개와 순종은 결코 진실될 수 없습니다.
순전한 믿음은 겁박과 협박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재앙이 무섭고 가난이 두려우며 질병이 염려되고 인생이 불안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활용해보고자 하는 신앙은 위기를 넘기기 위한 위장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불과 우박을 비처럼 내리게 하신 이유는 바로와 신하들을 겁주어 회심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이 재앙의 목적을 밝힙니다.
“땅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알게 하리이다.”
재앙의 목적은 징계가 아니고 애굽을 돌이키게 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재앙의 목적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온 땅이 여호와께 속한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땅의 주인이 나를 돌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고 가르치셨습니다.
땅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의식주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하나님은 우리를 공포로 다스리지 않으십니다.
사랑으로 다스리십니다.
공포 때문에 무릎 꿇는 것은 진정한 순종이 아닙니다.
신뢰하는 이를 사랑으로 따르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주님은 두려운 상황 속에서, 공포를 넘어서게 하는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땅이 여호와께 속했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의식주의 공포를 넘어서게 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의 십자가 사랑은 우리의 인생에서 두려움을 내쫓고 온전한 사랑으로 채우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