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다 보면, 앞뒤가 꽉 막힌 것 같은 절망의 순간을 마주합니다.
마치 거대한 벽처럼 앞을 가로막은 홍해와, 등 뒤에서 달려오는 병거들 사이에 끼어버린 진퇴양난의 순간 말입니다.
출애굽기 14장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딱 그런 처지였습니다.
마음을 바꿔먹은 바로는 이스라엘을 다시 잡아올 심산이 아니었습니다.
자존심의 상처와 장자를 잃은 분노 속에 그가 보낸 600대 이상의 최정예 병거는 오직 살육을 위한 군대였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실제적인 살기가 되어 목을 조여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비명을 지르는 것뿐이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광야까지 끌어내어 죽이려 하느냐!”
그들의 부르짖음은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었고, 내 뜻대로 상황이 통제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와 책임 전가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가스라이팅’ 하려 듭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깁니까?”,
“지금 당장 해결해 주지 않으면 더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
마치 백화점 장난감 코너에서 드러눕는 아이처럼,
우리는 소리를 지르며 하나님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 합니다.
하나님을 동원하려는 부르짖음은 믿음이 아니라 비뚤어진 통제 욕구일 뿐입니다.
기도란 내 뜻을 실현하기 위해 하나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의 뜻이 멈춰서는 것입니다.

모세는 울부짖는 백성들을 향해 “너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라”고 명령합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요?
손 하나 까딱하지 말고 움직이지 말라는 뜻일까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잠잠하라는 뜻입니다.
원망의 부르짖음을 멈추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잘못을 뒤집어 씌워 빚진 마음으로 보상적 행위를 하도록 몰아붙이려는 모든 유아적 시도를 멈추고,
신뢰가 아닌 불안 때문에 내지르는 모든 비명과 불신의 몸부림을 멈추라는 명령입니다.
소리 지르고 발버둥 칠수록,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기 위해선 잠잠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선하신 구원을 바라볼 생각 없이 그저 비명만 내지르는 이스라엘을 징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홍해(얌 수프) 앞에서 울부짖는 이스라엘을 보시며,
과거 나일강의 갈대(수프) 사이에서 울고 있던 아기 모세를 떠올리셨습니다.
하나님에게 이스라엘은 명령에 반역하는 군대가 아니라,
좌우를 분간하지 못하고 울고 있는 갓난아기였습니다.
하나님은 “왜 부르짖느냐”고 모세에게 물으십니다.
모르셔서 물어보심이 아닙니다.
책망하려고 물어보심이 아닙니다.
이는 바로의 딸이 물에서 건진 아기를 안아 달래주었듯,
하나님께서 울부짖는 이스라엘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달래주심입니다.
“왜 울고 있어~ 일어나자~ 가자~”

하나님의 사자가 이스라엘과 애굽 병사들 사이를 막아서고 지켜주시는 동안,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바다를 향해 손을 뻗었습니다.
애니메이션 ‘이집트의 왕자’에선 모세가 지팡이를 내려치자 바다가 폭발하듯 갈라졌습니다.
영화 ‘십계’에서도 모세가 손을 뻗는 순간 장풍처럼 물이 갈라졌습니다.
우리는 극적이고, 즉각적이고, 눈부신 기적의 장면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기록은 우리의 상상과 다릅니다.
모세가 손을 내밀었을 때, 그 즉시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1분, 10분, 1시간이 지나도 눈앞의 바다는 그대로였습니다.
백성들의 기대와 다른 잠잠함에 백성들은 이전보다 더욱 자지러지게 울었을지도 모릅니다.
기적은 순식간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밤새도록’ 일어났습니다.
밤새도록 ‘동풍’이 바다를 갈라왔습니다.
동풍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막아서고 있는 홍해 바다 건너편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입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수평선 너머에서부터 바다는 갈라지고 있었습니다.
내 눈앞에 당장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불신으로 원망을 터뜨리는 그 순간에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잠잠할 수 있습니다.
원망의 비명을 멈출 수 있습니다.
주술 같은 부르짖음을 중단할 수 있습니다.
광야를 안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안식의 핵심은 멈추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는 믿음만이
우리의 광야 같은 인생을 안식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합니다.

지금 바다 앞에 서 있습니까?
대적에게 쫓기고 있습니까?
그래서 무언가 부르짖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함 속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잠잠해야 할 때입니다.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부르짖는 비명을 멈추고,
잠잠히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포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치열한 믿음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내 삶의 도구로 동원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내 삶의 주권자이신 그분이 일하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원망이 아닌 감사함으로,
비명이 아닌 잠잠함으로,
수평선 너머에서 일하시는 ‘동풍’을 볼 수 있도록,
우리를 안고 우리의 불안과 두려움을 달래주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