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풍이 밤새도록 바다를 가르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아침이 되어서야 갈라진 바닷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횡단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200만 명의 거대한 행렬이 가축과 짐을 이끌고 바다를 지나는 데에는 꼬박 하루가 더 걸렸습니다.
백성들 중 마지막으로 바다에 들어간 사람들은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기까지
아침부터 밤 9시가 되도록 17시간 이상을 기다려야만 했을 겁니다.
그 오랜 시간 애굽 병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하지 못했던 것은
이스라엘 진 뒤에 서 계신 하나님의 사자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애굽 병사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고 계셨습니다.
애굽 병사들은 지난밤부터 꼬박 하루가 넘는 시간을 불기둥과 대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늦은 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지막 무리가 바다로 들어가자,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불기둥과 대치하던 애굽 병사들도 거침없이 바다로 따라 들어갔습니다.
애굽 병사들은 그 상황이 무섭지 않은 것일까요?
그들 눈앞에 버티고 선 불기둥이, 바다를 갈라버린 동풍의 위력이,
자기 백성들을 지키시기 위해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신적 개입이 무섭지도 않은 것일까요?
간이 부은 듯 겁을 상실한 애굽 병사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불기둥의 뒤를 따라 바다로 들어간 것일까요?
처음 불기둥을 대면했을 때, 그들은 간담이 서늘해졌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들이 불기둥 앞에서 대치하고 있던 그 긴 밤시간 동안,
그들은 불기둥과의 대치 상황에 익숙해졌습니다.
바다가 갈라져 있는 것을 발견한 아침에도 그들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겠지만,
그날 한나절을 넘어 다시 밤이 깊어가는 동안 그들은 불기둥과 갈라진 바다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인간은 원래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에 공포를 느낍니다.
내일 일이 불안한 것도 미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고,
낯선 이들을 경계하는 이유도 미지에 대한 불안함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지의 대상에 대한 정보가 쌓여가는 순간,
미지의 대상이 통제 가능한 수준의 위협이라고 판단하게 되는 순간,
공포는 사라지고 익숙함이 찾아옵니다.
애굽 병사들이 불기둥과 대치하고 있던 30여 시간 동안,
수많은 돌파 시도에도 불구하고, 불기둥은 한 번도 길을 내주지 않았지만,
동시에 한 번도 애굽 병사들에게 위해를 가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느새 애굽 병사들은 겁에 질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계산’하게 된 것입니다.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면 우리가 안전한가?”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관찰하고 패턴을 분석하여 자신들만의 ‘안전거리 공식’을 만들었습니다.
경험이 공식이 되는 순간,
경외함은 사라지고 오만한 계산만 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했습니다.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대상을 두려워하지 않던 그들의 최후는
예상치 못한 불기둥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급작스럽게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병거 바퀴를 부수시고 그들의 다리를 무겁게 하사 바다 한가운데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발을 묶어놓으신 것입니다.
그제야 애굽 병사들은 여호와가 자신들을 상대로 싸우신다고 외치며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애굽 병사들은 그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하나님의 사자와 함께 회복한 바닷물 속에 잠겨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바다 한가운데서 그들의 계산기를 깨뜨리십니다.
하나님은 계산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예측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공식에 갇히는 분이 아니심을 온 애굽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슬프게도 이 ‘애굽의 유산’은 오늘날 우리 안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이 정도 헌신하면 복을 주시겠지”,
“이 정도 죄는 사랑으로 덮어주시겠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화를 내지 않을 만큼의 적정 거리를 계산하며 그분을 이용하려 합니다.
홍해에 가라앉아야 했던 애굽은 우리의 옛 주인으로서,
죄악 된 우리 옛사람의 본성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군대를 단번에 태워버리지 않으시고, 굳이 병거 바퀴를 부수고 그들을 묶어두신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의 ‘옛 주인’이자 ‘옛사람’인 애굽을 끌어안고 함께 바다에 잠기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치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든 논개처럼
주님은 우리의 원수를 끌어안고 죽임 당하셨습니다.
노아를 대신해 홍수에 던져졌던 방주(테바)처럼,
모세를 대신해 나일강에 던져졌던 갈대상자(테바)처럼,
하나님은 스스로 우리의 ‘테바’가 되어 심판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내셨습니다.
홍해는 하나님을 계산하고 이용하려던 나의 ‘옛 주인,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 곳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거리를 재며 내 맘대로 살려했던 우리의 오만함을 안고 함께 죽으셨습니다.

추격해 오던 애굽 군대를 보고 두려움에 떨던 이스라엘은
바닷가에 떠밀려온 애굽 군대의 시체를 보았을 때,
그 두려움이 변하여 하나님을 경외함이 되었습니다.
내 경험으로 하나님을 통제하려던 옛사람이 죽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랑하는’ 참된 생명이 시작됩니다.
주와 함께 죽어야 주와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의 두려움을 죽이고,
우리 안에 하나님 경외함을 살아나게 하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