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5장에서 성경은 우리 인생의 비참함을 한 단어로 요약합니다.
바로 곡초 그루터기라는 뜻의 단어 ‘카쉬’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시절, 바로가 지푸라기 없이 벽돌을 구우라고 명령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벽돌의 형태를 유지해 줄 최소한의 섬유질을 구하기 위해 거친 들판을 헤매야 했습니다.
이미 추수가 끝난 메마른 들판을 누비며, 한 번 더 추수하듯 허리 숙여 단단한 곡초 그루터기를 베어야 했던
그들의 등 위로 뜨거운 태양과 채찍이 쏟아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카쉬’는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뼛속까지 스며든 노예의 고단함이자 가장 비참하고 분주했던 순간의 눈물입니다.
그런데 모세와 미리암이 부르는 노래에서 이 단어가 다시 한번 등장합니다.
마른 섶이 불꽃에 순식간에 삼켜지듯,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가 대적들을 그 비참했던 ‘곡초 그루터기’처럼 단번에 먹어 치우셨다고 노래합니다.
우리가 당했던 고통의 방식 그대로 적을 심판하심으로 우리의 억울함을 씻어내십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곡식 그루터기를 삼키자,
놀랍게도 출렁이던 바닷물이 엉기기 시작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마치 우유가 응고되어 치즈가 되듯, 진흙과 지푸라기가 엉겨 단단한 벽돌로 구워지듯,
바닷물은 하나님의 콧김 아래 엉기어 거대한 성벽처럼 쌓여갔습니다.
즉, 홍해 한복판은 단순히 대적들을 수장시키는 심판의 현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대한 건축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대체 하나님은 그 거친 바다 밑바닥에서 무엇을 지으려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 ‘성소’였습니다.
이 성소는 훗날 예루살렘에 세워질 화려한 돌 건물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홍해라는 죽음의 심연을 건너와 하나님의 정당한 상속자의 자리인 ‘오른편(야민)’에 서게 된 백성들,
그들이야 말로 주께서 그토록 짓고 싶어 하셨던 주의 손으로 만드신 진짜 성소였습니다.
하나님은 대적들을 그저 치워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교만을 재료 삼아 당신의 백성들이 거할 영광스러운 처소를 지어버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토록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성소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의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기업 무를 자(고엘)’가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고엘이란, 친족의 빚을 대신 갚아주고 잃어버린 상속권을 되찾아주며, 종 된 신분을 회복시켜주는 형제의 의무를 뜻합니다.
룻기에서 보아스가 룻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며 기업을 물렀던 것처럼,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모세의 신을 벗기시며 친히 우리의 고엘이 되겠노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이제 홍해에서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모세는 노래하고 증언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 16절의 ‘사신 백성’이라는 표현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피 값으로 사셔서 이제는 노예가 아닌 상속자의 지위로,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이스라엘을 비참하게 했던 옛 주인이 홍해 깊은 곳 스올로 잠겨버렸을 때,
이스라엘의 노예 근성 역시 영원히 수장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 이상 시선을 땅에 박고 곡식 그루터기 사이를 헤매며 세상의 벽돌을 구울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들의 모든 시간과 영혼을 빼앗아갔던 분주함과 완전한 결별이 이뤄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직장이라는 성을 쌓기 위해,
커리어라는 세상의 벽을 높이기 위해
벽돌 재료를 찾아 헤매는 분주함 속에 살면서,
우리의 시선은 온통 땅바닥의 그루터기들에 매여 있지 않습니까?
너무 바빠서 기도할 수 없고
너무 피곤해서 말씀을 펼칠 수 없다면,
우리는 아직 홍해 너머가 아니라 애굽 한복판에서 바로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분주함이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고됨이 죽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성을 십자가에서 죽이시고 성소로서 주와 함께 살아나게 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벽돌을 굽는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오른손이 붙들고 계신 거룩한 성소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과 눈물 젖은 분주함마저도 당신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재료로 바꾸십니다.
주님은 헤세드의 사랑으로 우리를 주의 오른편, 상속자의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사랑이 아니면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에 빚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께서 성소된 우리의 삶에 원하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믿으세요.
주님은 우리를 사랑의 빚을 진 자답게,
그 큰 사랑에 사랑으로 반응하며 당당히 노래하는 상속자의 삶을 살아내도록
우릴 이끌어주실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