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내려온 만나는 참으로 묘한 양식이었습니다.
해가 뜨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거두어 둔 만나도 하루를 넘기면 벌레가 생기고 악취를 풍겼습니다.
자연의 법칙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는, 애초부터 자연현상이 아니라 언약의 방식으로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만나는 스스로의 성질로 썩고 보존되는 음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썩기도 하고 썩지 않기도 하는 양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주시며 매일 아침 그날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다음날 아침까지 만나를 남겨두었습니다.
그러나 욕심으로 한 오멜 이상 모아놓았던 것들은 다음날 아침이 될 때 모두 썩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만나를 모아두었던 이유는 내일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어제와 오늘은 양식을 내려 주셨지만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시면 어쩌나 하는 불안,
그래서 이 양식을 내일도 주실는지 알 수 없다는 두려움이 그들로 하여금 양식을 쌓아놓게 만들었습니다.
두려움은 내가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서 옵니다.
그래서 사람은 무엇인가를 소유함으로써 그 두려움을 상쇄하려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AI 기술의 급성장과 급변하는 사회 구조, 인구 소멸의 뉴스 앞에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축적하고 자산을 확보하려는 모습 역시 내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듯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가르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양식일지라도, 그것을 내 두려움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삼고 내 통제 아래 두려 하는 순간,
그곳에서는 벌레가 꼬이고 악취가 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해 내 욕망을 합리화하는 기복주의,
청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말씀의 날을 무디게 만드는 종교적 열심 역시 결국 영적인 악취를 풍길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만나에 대한 ‘소유권’이 아니라 ‘사용권’만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하루를 넘기지 않고 썩어버렸습니다.
아무도 이 만나를 저장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광야 인생의 주도권이 결코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선포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썩어야 할 만나가 썩지 않는 날이 등장합니다.
안식일입니다.
여섯째 날에 거둔 만나가 다음 날까지도 온전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의 공급에 인간의 수고가 더해졌지만,
안식일에는 인간의 공로가 배제됩니다.
안식일이란 일한 만큼이 아닌 은혜로서, 이미 준비된 양식을 감사함으로 먹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매일 썩어버리던 만나를 썩지 않게 하십니다.
안식일은 썩지 않는 만나를 먹는 날인 것입니다.
이 썩지 않는 만나의 신비는 ‘에바’의 정의를 설명함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성경은 오멜이 에바의 십 분의 일이라고 규정합니다.
오멜이 한 사람의 주관적인 부피 단위(한 아름)라면,
에바는 모든 거래의 공평한 기준이 되어야 하는 객관적 정량적 단위입니다.
인간의 발 크기에 따라 달라지던 ‘피트’라는 단위가 영국의 헨리 1세의 발 길이를 기준으로 고정되었듯이,
하나님은 제각각인 인간의 오멜을 정렬시킬 절대적인 기준(Canon)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막 안, 증거판 앞에 간수된 ‘썩지 않는 만나 항아리’였습니다.
삶의 공평한 기준, 판단의 기준이 인간의 경험이나 계산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만나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에 썩지 않았던 만나, 여호와 앞에 있을 때 썩지 않는 그 양식이 이스라엘이 살아갈 새 삶의 새로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할 이 ‘썩지 않는 만나’가 무엇인지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직접 그 정체를 밝혀 주셨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나는 생명의 떡이니.”(요 6:27, 35).
그렇습니다. 썩지 않는 만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매일의 순종으로 연명해야 했던 율법의 시대를 지나,
그분의 공로에 참여함으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는 복음의 실체입니다.
광야의 만나가 매일의 순종을 훈련하는 율법의 역할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 율법을 완성하신 참된 생명의 떡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만나를 썩지 않게 하시고 매 안식일마다 양식으로 주셨듯,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시고 새로운 계명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하게 하시고 우릴 위한 생명의 떡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을 먹고 마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먹는 삶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분을 ‘말씀’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경이라는 양식을 단순히 지식으로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위해 하신 일을 기억하며 그 복음을 물고, 뜯고, 씹고, 맛보는 것입니다.
내 고통의 현장에서, 내 결핍의 광야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음미하며
그분이 내 삶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썩지 않는 만나를 먹고사는안식일은 단순히 일주일 중 하루를 쉬는 날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주일성수 정도로 그치지 않습니다.
썩지 않는 만나이신 예수를 내 삶의 유일한 ‘캐논’으로 삼아,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안식’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우리가 생명의 말씀을 먹고 그분을 닮아가는 삶을 살 때,
광야는 더 이상 공포의 땅이 아니라 하늘의 은혜가 비처럼 내리는 축복의 땅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