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중립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서 옛 주인들을 물리치고 애굽을 탈출했다는 출애굽 사건의 소문 역시 중립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이 어떤 이에게는 거슬림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기쁨이 되듯,
같은 소문을 듣고 어떤 이는 칼을 들고 달려왔고, 어떤 이는 찬송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동일한 구원 사건 앞에서 인간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라집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이 휘몰아친 후, 이스라엘을 찾아와 하나님을 찬양한 사람은 바로 모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였습니다.
이드로는 모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이스라엘 진영에 찾아왔습니다.
시내산에서의 언약 공동체의 탄생을 불과 며칠 앞두고 흩어져있던 가족들을 모아 가족이 재구성되는 장면은 의미심장합니다.
언약 공동체의 탄생이란,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에 들어온 이후 430년 만에 언약을 통해 가족이 재건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엄숙한 순간에, 성경은 뜻밖에도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킵니다.
이드로는 혈통으로 보자면 언약 밖의 사람이고, 신앙의 배경으로 보자면 다른 종교 전통 위에 서 있던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드로는 이방인을 넘어 하나님 앞에서 함께 식사하는 가족이 됩니다.
500년 넘게 아브라함의 신앙에서 떨어져 나갔던 이방인이 어떻게 언약 공동체의 식탁에 앉을 수 있었을까요?
그 열쇠는 이드로라는 이름의 뜻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드로의 이름은 히브리어 ‘예테르’에서 왔습니다.
이는 ‘넘치다’ 혹은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슥14:16에서 이방인들 중 ‘남은 자’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러 올 때 사용된 이 단어는,
이드로가 단순히 우연히 찾아온 손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라는 신부를 완성하기 위해 남겨두신 존재임을 시사합니다.
이드로라는 호칭은 출애굽기 3장과 출애굽기 18장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된 호칭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적 가족의 탄생에 맞추어 이방인의 남은 자로 이드로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드로를 통하여 가족을 완성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신앙으로 반응하게 하기 위하여 남겨놓은 이방인’이었던 이드로는 모세의 환대를 받습니다.
모세는 이드로에게 그간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이적들을 모두 다 이야기했습니다.
모세는 결코 그를 신앙적으로 정복하려 하거나 굴복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이드로를 논쟁으로 제압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감격스러운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을 뿐입니다.
모세의 이야기는 이드로를 기쁘게 했습니다.
이 기쁨은 그들이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 되었음을 알려줍니다.
가족이란 사랑하는 이의 가슴 설레어하는 이야기들을 함께 기뻐하며 듣게 하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인 존중 위에서 들려진 이 복음의 이야기는
이드로의 입에서 “이제 내가 알았도다”라는 고백을 끌어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이드로는 유월절을 보지 못했고 홍해를 건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들은 말씀을 통해 “이제 알았다”라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 이후에야 그는 하나님 앞에서 식탁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이 식사는 단순한 만찬이 아니라 제사, 곧 예배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함께 떡을 먹는 사람들, 그것이 가족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들음은 대화를 통해 일어납니다.
대화란 결코 싸움과 다툼을 통해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전도란 영적인 전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전도란 투쟁이 아닙니다.
전도는 가족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상대방을 구원하고 싶다면, 구조하고 싶다면,
먼저 대화가 들리는 관계, 사랑의 관계,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가족으로 삼고 싶다면,
다툼과 싸움으로는 그를 가족으로 얻어낼 수 없음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가족은 싸워서 얻어내는 대상이 아닙니다.
정복하거나 굴복시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한 때 변증학이라는 학문이 각광을 받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상대방의 잘못된 신념과 논리를 무너뜨리면
그 무너진 마음의 빈자리 위에 진리를 대신해 세울 수 있으리라 생각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이내 변증학으로는 사람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확고한 진리 체계의 견고함으로 상대방을 박살 내는 방법으로는
상대방을 가족으로 얻을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가족은 무너뜨리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기뻐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에 도달한 정도는 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십자가에 더 가깝고, 누군가는 아직 멀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복음의 소식에 함께 기뻐할 수 있다면,
내 형제의 경사에 배 아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찬송할 수 있다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으로 함께 기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같은 방향을 걷고 있는 가족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형제와 대적을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그것은 정도가 아니라 방향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느냐,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아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만을 향하는 기쁨의 방향이 동일한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으며 진리를 함께 기뻐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가 진리에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의 관계에서 물러서지 않도록,
진리와 사랑이 함께 입 맞추도록,
스트레이트 하면서도 카인들리 하도록,
우리 가운데 기쁨의 방향이 되어주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