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 후 이스라엘이 시내 광야에 머물게 된 이튿 날,
모세의 일상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백성들을 재판하는 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장정만 60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송사를
단 한 사람이 감당하는 광경은 표면적으로는 모세의 헌신과 백성의 경건한 의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장인 르우엘은 이 광경을 보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네가 하는 것이 옳지 못하도다.”
우리는 흔히 이 대목을 효율적인 조직 관리를 위한 업무 분담과 권한 위임의 문제로만 읽곤 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겨냥하는 지점은 훨씬 더 깊은 곳, 즉 인간의 교묘한 죄성에 닿아 있습니다.
왜 백성들은 굳이 모세 한 사람만을 고집하며 줄을 섰을까요?
이스라엘에는 이미 장로들이 있었고 공동체의 수령들이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백성들이 오직 모세만을 찾았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내 위에는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무의식적 선언과 맞닿아 있습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 말씀만 듣겠다”거나 “하나님만 상대하겠다”는 고백은
얼핏보기엔 매우 영성 깊은 표현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나 자신을 하나님 버금가는 자리에 앉히고 싶은 욕구가 숨어 있습니다.
인정하지 않는 이의 권위에는 순복하기 싫어하는 자존심은,
오직 ‘하나님의 대리자’인 모세 정도가 아니라면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겠다는 고집으로 표현됩니다.
이러한 숨겨진 교만의 욕구는 영적인 병목 현상을 만들어
리더와 백성 모두를 기진하게 하고, 결국 공동체 전체를 마비시키기에 이릅니다.
르우엘이 제시한 해결책은 단순히 사람을 세워 효율적으로 일을 나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조직 개편에 앞서 “가르침”을 선행하라고 조언합니다.
판결은 이미 일어난 과거 사건의 시비를 가리는 일이지만,
가르침은 미래의 삶에 일어날 일들을 예방하는 원리가 됩니다.
르우엘의 제안은 모세의 역할을 ‘판결자’와 ‘해결자’에서 ‘교사’로 전환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율례의 원리가 백성들의 마음에 새겨질 때, 성경이 말하는 놀라운 표현대로,
그들은 ‘스스로 재판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재판함이란 공동체 질서를 벗어난 자율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안에서 책임 있게 판단하는 성숙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가 마음에 내재화될 때 진정한 성숙이 일어납니다.
이 성숙은 매 순간 하나님의 구체적인 음성이나 명령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무속적 신앙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성품과 원리를 깊이 체득하여, 일일이 묻지 않아도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행하는 ‘적극적 순종’입니다.
마음에 법이 새겨진 사람은 타인에 의해 통제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다스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꿈꾸시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의 모델입니다.
이러한 질서를 세우기 위해 선출되는 리더의 기준 역시 세속적 스펙과는 궤를 달리합니다.
성경은 ‘능력 있는 사람들’과 ‘진실한 사람들’을 세우라고 합니다.
’능력 있는 사람들(안쉐이 하일)’이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진실한 사람들(안쉐이 에메트)’이란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정의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일을 섭리하시기에, 진정한 능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서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불의한 이익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자리가 주는 이익을 탐하는 ‘군림’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스스로 다스려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권위에 대한 고정관념의 전복을 경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권위는 ‘상하 관계’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권위란 ‘상하관계’가 아닌 ‘역할’을 수행하는 질서에서 나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의 권위는 피라미드 위로 올라가 더 많은 사람을 부리는 ‘계급’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래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더 무겁고 어려운 문제를 대신 짊어지는 ‘무게’입니다.
천부장은 십부장이 감당하지 못하는 짐을 대신 져주는 자이며,
모세는 그 모든 리더가 감당하지 못하는 일들을 도와주는 자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돕는 가운데, 더 높은 자리는 더 많이 섬기는 자리이며,
능력은 낮은 곳을 향하는 사랑의 도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통치는 군림이 아니라 다스림이며, 다스림의 본질은 사랑의 섬김입니다.
우리 주님이 바로 그렇게 사랑으로 섬겨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셨음에도,
율법에 대한 가장 완벽한 ‘능동적 순종’을 통해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주님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과 성품을 온전히 아셨기에 스스로 자기를 내어주셨습니다.
그분의 순종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하게 다스리는 사람이 됩니다.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이 됩니다.
권위를 ‘나를 억압하는 힘’이 아닌 ‘나를 돕는 은혜’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세우길 원하십니다.
‘주와 함께 천년동안 왕 노릇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세상을 온전히 다스리게 하시려고 우리게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우리는 주의 부르심을 따라 다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를 섬길 십부장으로, 백부장으로, 천부장으로 부르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