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한 지 오십일째 되는 날,
시내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강림하셨습니다.
시내산은 구름과 번개와 나팔 소리로 진동했습니다.
장엄한 임재에 앞서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나의 말을 지키고 내 언약을 지키면,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요구를 전해들은 백성들은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하고 호기롭게 외쳤습니다.
하지만 이 당당한 고백 뒤에 돌아온 것은 하나님의 따뜻한 격려가 아니라, 서늘할 정도의 엄중한 경고였습니다.
“산 주위에 경계를 세우라. 누구든 이 산에 오르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나님은 수위 높은 말씀으로 “오지 마라, 가까이 오지 마라”고 반복하여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산까지 인도하시고,
또한 ‘순종하면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 될 것’ 이라고 약속하셨던 십계명을 선포하시는 순간에 이르러,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멀리하시려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경고는 사실 십계명의 원래 기능이자 목적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게 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경고입니다.
하나님이 접근을 금하신 이유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거룩함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십계명을 ‘복 받기 위해 지켜야 할 지침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지키면 복을 받는 통로가 아닌 죄인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죄인들이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 역할이 십계명과 율법이 해야하는 기능인 것입니다.

첫사람 아담의 타락 이후,
아담 안에서 원죄를 전가받아 아담과 함께 죄인이 된 인간은
이제 선악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 되어버린 탓에 스스로를 죄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감히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의롭고 선한 존재라는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죄의 특징은 죄인이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인이 자신의 부정함을 지닌 채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려는 것은
나방이 불꽃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곁을 허락지 않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십계명과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자격에 대한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신 순종의 드높은 기준 앞에 인간은 절망해야 합니다.
율법의 기능과 역할은 인간에게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경계요 경고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합니다.
기껏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친히 자신의 임재 앞에 세우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곁을 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아이러니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멀리 하시려고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여정을 묘사하시면서 ‘그들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다’고 표현하심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이 절망의 문턱에서 당신의 구원을 한 마리 새의 이미지로 설명하십니다.
흥미로운 점은 성경이 말하는 이 독수리가 히브리어로 ‘네세르’ 즉,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용맹한 사냥꾼 ‘이글(Eagle)’이 아니라,
사체를 찾아다니는 ‘벌처(Vulture)’라는 사실입니다.
큰 날개와 큰 부리, 큰 몸통이 특징인 독수리는 매와 달리 활강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냥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독수리는 죽은 시체를 먹고 삽니다.
시체를 먹는 새는 정결법상 부정한 짐승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자신을 이 부정한 새에 비유하셨을까요?
바로 여기에 복음의 핵심이 있습니다.
출애굽의 현장은 장자들의 죽음과 홍해의 심판으로 가득한 ‘시체 더미’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음의 한가운데, 부정함의 한복판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부정한 시체 위에 내려앉는 독수리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로 인해 죽어 자빠진 우리 위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렇기에 독수리 날개로 우리를 건지셨다는 표현은,
훗날 십자가라는 부정한 저주의 나무에 못 박히셔서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 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임 당하신 순종’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이들을 부르시는 명칭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아직 단 한사람도 제사장으로 임명하신 적이 없는 데도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제사장 나라를 삼아주시겠다던 약속 하시고선,
아직 그들이 지켜야 할 계명을 선언하시기도 전에 하나님은 그들을 이미 제사장이라고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자격 없는 이방인(고이)이 어떻게 거룩한 제사장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애초에 이스라엘이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하나님께서 다른 이의 순종으로써 이스라엘을 대신하게 하신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높으신 기준을 만족케하는 순종을 이룰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예수의 ‘율법을 행하신 순종’이 있었기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우리가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가장 아끼는 보배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룩한 절망만이 진정한 소망을 바라보게 합니다.
절망의 끝에서 고개를 들면,
죽음의 골짜기까지 내려오신 그리스도의 거대한 날개가 보입니다.
율법의 경고를 십자가의 보혈로 덮으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신 그 은혜의 날개 말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그의 ‘당하신 순종’과 ‘행하신 순종’이 있기에,
누가 뭐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반짝반짝 눈부신 보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