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의 아홉번째 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9계명의 명령을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적용합니다.
하지만 9계명의 원리가 몸담고 있는 본문은 사실 거짓말이 만연한 우리의 일상에서 시작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 계명의 적용은 일상까지 확장될 것이지만,
‘어디에’가 아니라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물으려면
이 계명의 원리가 몸담고 있는 특수한 상황 자체를 이해함은 매우 중요해집니다.
즉 아홉번째 계명의 요구가 “거짓말하지 말라”가 아닌 “거짓 증거하지 말라”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우리는 이 계명의 진정한 요구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증거’란 법정 용어입니다.
즉 9계명이 발동되는 전제는 법정이라는 제한적 상황에서 그 원리가 도출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형사 법정에는 네 가지 종류의 위치가 있습니다.
판결하는 판사, 죄를 묻는 검사, 범죄 의혹에 대해 심문받는 피고, 그리고 본 대로 말하는 증인입니다.
제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가 이 법정에서 어느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먼저 일러 줍니다.
우리는 증인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너희는 나의 증인”(사 43:10)이라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증인에게는 본분이 하나뿐입니다.
본 대로, 있는 그대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인은 감정에 휘둘려 말해서는 안 됩니다.
미운 사람은 실제보다 나쁘게 깎아내리고 고운 사람은 잘못마저 감싸 덮어 주려는 것,
그것이 바로 거짓 증거, 곧 위증입니다.
증인은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증인은 판사가 아니기에 판단의 결론을 내려놓고 상황에 맞추어 선악을 바꾸어선 안 됩니다.
상황의 정상 참작은 증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판사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증에는 착한 위증이나 나쁜 위증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참되신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은 ‘거짓’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주를 닮아가는 선한 일을 이루기 위해 거짓이 발 붙일 곳은 없습니다.
선한 목적을 위해서라도 거짓이 사용되어선 안된다는 것이 9계명의 문자적 요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차라리 침묵할 것을 명령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의 주 동사를 살펴보았을 때,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 “대답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침묵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당연하게도 하나님이 언제나 침묵을 요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웃에 대하여 증언할 때 ‘거짓’으로는 대답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증인의 침묵은 오직 선을 이루기 위해, 혹은 악을 막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행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침묵 만으로는 진실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없습니다.
진리를 세울 수 없습니다.
선을 도모할 수 없습니다.
의로움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법정에서 증인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진리를 드러내고 진실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증인이란, 거짓 증거로써가 아니라 진실한 증거로써 증언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것이 “거짓 증거하지 말라”라는 소극적 금지 명령에 대한 적극적 행위의 순종입니다.
선이 쓰러지고 의로움이 어두워지고 있는데 침묵하는 것은
악에 대한 동조요, 거짓에 대한 협력이요, 불의에 대한 방조일 뿐입니다.
침묵해야 할 때를 알고, 증언해야 할 때를 아는 것이 용기입니다.
증인은 용기를 내어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토해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두려운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숨김없이, 진실함으로 입을 여는 그 순간,
우리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진리와 진실이 아닌 시기와 교만과 탐욕과 음란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착한 척, 거룩한 척, 의로운 척 거짓으로 덮어놓았던 위장된 민낯이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재판석 앞에서 우리 양심의 가장 정직한 증언이, 도리어 우리 자신을 죄인으로 고발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본성은 사실 증인은커녕 증인석 근처에도 설 수 없는 범죄자임이 폭로되고,
결국은 피고석의 심판대로 끌어내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바로 우리의 위선이 폭로되는 법정의 심판대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패악을 거짓으로 위장하려 했던 죄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우릴 위해 변호인으로 나설 이웃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손가락질하고 정죄했던 피고석에 계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천지를 지으신 분, 마땅히 판사석과 검사석에 앉으셔서 우리를 심판하셔야 할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죄 없는 그분을 죄인으로 몰았지만,
그분은 그 위증을 피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우리의 죗값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는 위증으로 자신을 무고하게 정죄하던 우릴 위한 변호인을 자청하셨습니다.
우리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거짓으로 내 죄를 덮어 감추려 하였으나,
그분의 죄를 감추는 무책임한 위증의 덮음이 아니라,
죄의 무게를 온전히 드러내고 책임지는 희생으로 덮어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거짓이 아니라 책임의 희생으로 덮어주신 십자가는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증거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사랑으로 증언하고 계십니다(롬 8:34).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 사랑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우리를 다시 법정에 세우십니다.
피고인으로서가 아니라 다시 증인으로 말입니다. 그
분이 피고석으로 내려오심으로 우리는 증인석으로 올려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법정에서 우리에게 사랑과 생명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참된 이웃에 대해 증언하는 사람들로 부름 받았습니다.
참을 향하여 위증은 필요치 않습니다.
오직 우리가 겪은 사랑의 은혜만을 진실되게 증언하면 됩니다.

예수 믿으세요.
우리를 위해 증언해 주신 참된 이웃에 대해,이제 우리의 삶으로 증언할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