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그리스와 튀르키예 지역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탓에 오랜만에 들른 예루살렘에서 곤욕을 겪게 됩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을 율법 아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초대한 것을 유대인들이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천부장이 개입하여 폭력사태로 번지지 않도록 진정시키기에 나서자
바울은 자신을 해하려던 사람들에게 자신도 예전엔 당신들과 같았다며,
그래서 그들의 생각과 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설명을 시작합니다.
바울은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고
이후 ‘이 도’(호도스:길)를 따르는 이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향하던 중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일에 대해 들려줍니다.
이때 바울은 ‘교회를 핍박했다’는 표현이나, 혹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다’는 표현이나, 혹은 ‘기독교를 핍박했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대신
‘이 도’를, 즉 ‘이 길’을 핍박했다고 표현합니다.
이는 기독교라는 단어나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와 같이 교회와 복음을 표현할 단어가 아직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초기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 체계를 ‘이 길’이라고 불렀습니다.
길에는 항상 출발점이 있고, 도착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길’ 위에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놓여집니다.
대개는 목적지에 다다를 여러 경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잘못된 갈림길로 들어설 경우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는 막다른 길도 있습니다.
바른 길과 잘못된 길,
지름길로 보였는데 벼랑이 나오는 길,
돌아가는 길처럼 보여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는 유일한 길…
‘길’이라는 표현에는 이러한 내용들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상징들이 함축적으로 집약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언급한 ‘이 길’의 시작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여호와의 도(길)을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아브라함)를 택하였다’(창18:19)고 그 부르심의 이유를 설명하셨듯,
구약에서 언약 백성의 핵심 사명은 언제나 여호와의 길 위에서 벗어나지 않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길의 끝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누리는 기쁨의 안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혈통적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심지어는 약속의 땅에 도달하기도 전인 광야 길 위에서조차 하나님의 길을 걷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켜켜이 쌓아온 실패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길을 벗어난 자들의 참혹한 심판에서 그들을 건지시기 위해 고난받는 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가 밟는(다라크) 곳이 길(데레크)이 되어 그 길을 따라 걷는(할라크) 백성들을 진리로 이끄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께서 광야에 길을 내시고, 바다 밑에 길을 내시고, 사망에 길을 내어 백성들이 걸어갈 길을 만드시느라,
예수님은 십자가의 골고다 언덕을 마다하지 않고 밟으셨습니다.
그러니 그가 행하신 발자국마다 길이 되고,
우리는 이제 그가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진리를 향한 하나님의 이끄심은 때로 넓고 안락한 길이 아닌 좁고 협착한 길로 이어집니다.
그가 밟으신 곳마다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을 걷는 성도의 기본 설정값은 ‘십자가’와 ‘고난’입니다.
이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일은 그래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길만이 생명의 길이요, 복된 길이며, 구원의 유일한 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핍박과 고난의 길은 연약한 사람의 정신력만으로 인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붙잡아주심만이 이 길을 견디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이 길을 따라 계속 걸어나가는 것이야말로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됩니다.
구원의 증거는 그들이 입술로 부르는 찬양 때문이 아니라 이 길을 걸어가는 이들의 삶을 통해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즉 핍박과 고난에도 이 길을 벗어나지 않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송’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길’을 통하여 찬송을 받으시기 원하십니다.
“모든 일을 그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1,12)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구약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에 던져졌을 때,
그들의 고백은 풀무불 속에서도 보호받고 건짐받을 것을 신앙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을 찬송하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훗날 신약에서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의 깊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들의 찬양은 감옥에서 구출시켜주실 것을 확신하는 신앙의 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감옥에서도 하나님의 찬송을 멈추지 않을 뿐이었습니다.
그 증거로서 옥문이 열렸을 때에 아무도 도망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삶의 목적 역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와 함께 동행하는 ‘이 길’ 위의 사람들에게 있어 신앙 생활이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거나 안락하고 형통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길’ 끝의 영광을 바라보며 인내 속에 살아가는 성도의 삶으로써 노래되는 찬송이야말로 진정한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공적인 예배의 시간뿐 아니라 남아 있는 모든 일상의 생활이 하나님을 향한 사적인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만이 이 길을 끝까지 걷는 우리의 삶을 통해 찬송을 받으실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