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형사적인 책임뿐 아니라 피해 보상에 대한 민사적 책임까지.
책임이란 피해의 철저한 회복까지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피해의 규모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책임의 경계를 구분하는 일입니다.
출애굽기 22장도 바로 그 경계를 말합니다.
언제 배상해야 하고, 언제 배상하지 않아도 되는지.
누가 책임져야 하고, 누가 책임질 이유가 없는지를 하나님은 놀라울 만큼 공의롭게 구분하십니다.
징벌적 손해배상으로서 도둑은 훔친 것을 여러 배로 갚아야 했습니다.
소를 도둑질해 팔았으면 다섯 배로, 양은 네 배로 갚아야 합니다.
도둑질을 완수하지 못해 중간에 잡혔다면 갑절을 배상해야 합니다.
부주의로 이웃의 밭을 망쳤다면 그 피해를 배상해야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배상할지니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책임만큼 갚아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갚을 능력이 안 된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고대 근동의 함무라비 법전의 경우 갚지 못하는 도둑은 사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손해와 관련한 범죄에 대해 사형 대신 몸을 팔아서라도 갚게 하십니다.
도둑을 죽이면 배상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도둑을 죽이는 법이 아니라, 도둑이 갚게 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죄인의 멸절이 아니라 피해의 복구인 것입니다.

피해가 발생했다고 모두 배상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책임이 없다면 배상하지 않아도 됩니다.
재산을 맡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도둑을 맞았다면 책임지지 않습니다.
원주인이 가지고 있었어도 작정하고 들어오는 도둑은 막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맡은 양이 제 발로 울타리를 벗어나 들짐승에게 찢겼다면 책임지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그 찢긴 것을 증거로 가져오는 것으로 족합니다.
맡은 것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여호와께 맹세한 사람은 갚아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책임이 없으면 배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 곧 생명과 시간, 가정과 자녀, 복음과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모든 것들은 온전히 관리되지 못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첫사람 아담에게 맡기셨던 모든 것들이 상실된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제 발로 사라진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담은 주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것들을 마치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사용하다 망가뜨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역시 “내 몸이니까, 내 인생이니까, 내 돈이니까, 내 자녀니까” 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아닌 나를 위해 ‘사용’합니다.
그렇기에 전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징벌적 배상을 피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팔려가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죄인들은 이 상황에 도리어 하나님께 책임을 묻습니다.
‘성령을 주셨다면서 왜 죄를 막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우리를 맡기셨다면 알아서 우리가 죄 짓지 못하게 막으셔야 하지 않으셨습니까’
죄인들은 하나님 탓을 합니다.
그의 잘못이니 그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반대였습니다.
목자가 양을 버린 것이 아니라, 양이 목자를 버렸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은혜의 울타리를 제 발로 넘어간 것은 우리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에겐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검과 몽치를 들고, 강도를 잡듯이, 밤에 그분을 잡아 갔습니다.
그분은 잘못이 없으시기에, 하나님 앞에서 한 번만 맹세하시면 되었을 겁니다.
“저들은 자기 발로 나갔습니다. 저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 한마디면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재판정에서 침묵하셨습니다.
맹세 한 번이면 벗을 수 있는 책임을, 침묵으로 짊어지신 것입니다.
책임이 없으신 분이 책임을 떠안으셨고, 갚을 것이 없는 우리의 빚을 자신의 몸으로 배상하셨습니다.

출22장의 ‘배상하다’라는 말은 ‘샬렘’입니다.
그리고 그 명사형이 ‘샬롬’입니다.
평화는 그냥 찾아오지 않습니다.
깨어진 것이 회복될 때 찾아옵니다.
잃어버린 것이 복구되고 채워질 때 이루어집니다.
배상이 끝난 자리에 화목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
배상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시며 찢겨진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요 20:20).
찢긴 것을 가져다가 증거로 삼으라던 그 법(출22:13)대로,
찢기신 몸이 법정에 증거로 제출된 것입니다. ”
배상할지니라”는 정의는 그분의 것이 되었고,
“배상하지 아니하리라”는 은혜는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배상은 그분의 의무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책임이 아니었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찢을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분은 우리의 ‘평화’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행하는 것,
그것은 사랑입니다.
율법은 책임의 경계를 말하지만,
사랑은 그 경계를 넘어서게 합니다.
이 사랑과 은혜는 책임의 면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신뢰를 복구시키고, 다시금 모든 것들을 맡기게 합니다.
주님은 실패했던 베드로에게 다시 양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도 다시 시간을, 인생을, 자녀를, 가정을, 복음을, 그리고 교회를 그의 사랑으로 맡겨주십니다. 

예수 믿으세요.
책임을 넘어서게 하는 주의 사랑이
우리를 의무가 아닌 사랑으로 섬기게 하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