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람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께 범죄 한 직후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자신의 벗은 몸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벗은 몸을 가렸다고 해서 수치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담은 그런 그를 찾아와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피해 나무 사이에 몸을 숨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가린다고 가려지는 것이 아니고, 숨는다고 숨어지는 것이 아니건만,
죄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자신의 죄악을 가리려 하고 숨어보려 합니다.
그러나 정작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그의 죄악을 폭로하여 그를 꾸짖고 심판하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버린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수치를 가려줄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26장에 이르러 하나님은 아담에게 지어 입히셨던 가죽옷과 같은 단어로 성막을 만들게 하십니다.
바로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입니다.
붉게 물들였다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아담’이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가죽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오르’가 붉게 물들였다는 히브리어 ‘아담’과 함께 사용된 것입니다.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히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아담을 떠올리게 하는 붉은 가죽으로 자신의 거처를 덮게 하신 것입니다.

‘아담’과 ‘가죽’ 이외에도 창세기 3장과 출애굽기 26장 사이에 흥미로운 공통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룹’의 등장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히신 후, 그를 에덴에서 쫓아내시면서
그룹들을 세워 생명나무로 가는 길, 에덴의 동쪽을 지키게 하셨습니다(창 3:24).
쫓겨난 죄인들은 ‘그룹’에게 가로막혀 감히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성막의 가장 안쪽 덮개와 휘장을 만들게 하시며 이 그룹을 수놓아 만들게 하십니다.
청색과 자색과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정교하고 화려하게 짠 휘장은 하나님의 거처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더욱이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에도 그룹들을 수놓게 하셨습니다.
에덴에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던 그룹들이 성막에서는
하나님의 임재에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경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룹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을 날개로 덮고 있는 화려한 휘장 위를 다시 염소털 장막이 덮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위에 붉게 물들인 숫양의 가죽이 덮입니다.
그리고 맨 바깥쪽엔 해달의 가죽을 덮게 하셨습니다.
성막을 덮는 덮개는 이렇게 네 겹이나 되었습니다.
덮개가 덮이고 덮이고 덮어서, 밖에서 보았을 때는 성막 안쪽의 화려함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덮고 덮고 덮어서 전혀 보이지 않게 가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가려도 가려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아니, 가렸기에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라고 명령하신 목적을 성경은 분명히 밝혀두었습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이유조차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함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출 29:46).
그것이 네 겹의 성막 덮개 중에 염소털로 짠 천막이 사용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염소털로 짠 천막은 일반 백성들이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친 텐트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은 이 백성들 사이에 거하기 위해 성막을, 텐트를 치게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찬란한 영광과 거룩하신 의로움 그대로 임재하시어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면,
죄인들에게는 피하고만 싶은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그분의 공의를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진멸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리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가리어 죄인들과 함께 하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마치 아담의 수치를 가리어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에서 인간을 가려주셨듯이,
성막은 그 아담에게 베풀어주셨던 가리심의 은혜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 자체를 가려주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입고 오심과 같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가려서라도 인간들과 함께 하시고자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사랑은
오히려 가릴수록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인간의 수치를 가려주신 것과 자신의 영광을 가려주심은 죄인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요 1:14).
여기서 ‘거하시매’라는 표현은 텐트를 치고 거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장막을 치셨던 것처럼,
이제 영원하신 말씀이 친히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께서 종의 형체를 취하셨고,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빌 2:6–8).
그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고 있었습니다(골 2:9).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덕분에 죄인들은 감히 바라볼 수 없었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이
도리어 우리가 바라볼 수 있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가리신 것은 우리에게서 멀어지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가리우심으로써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고 그분을 피해 숨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가죽옷을 입혀 주신 하나님께서, 마침내 우리를 위해 가죽옷을 입으신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의 사랑은 바다 끝에라도 찾아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랑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