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기도를 마치셨을 때 한 제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기도에 대해 여쭤보며 가르침을 청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전에도 이미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신 적이 있었습니다.
일 년여 전 갈릴리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한 산에서 예수님은 팔 복에 대해 말씀하시며 주기도문으로 잘 알려진 기도를 가르쳐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이로 보아 이 제자는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던 시절에는 함께 하지 않았던 제자인듯합니다.
그러니 그는 열두 명의 제자는 아니고 칠십 인의 제자이든지 혹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오시던 중 합류하게 된 제자들 중 한 명이었을 겁니다.
생각해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기도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유대인들이 새삼스레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하는 것은 참 희한한 일입니다.
게다가 세례 요한의 제자들까지 언급해 가며 기도에 대해 문의합니다.
이 제자는 세례 요한 공동체를 대표하는 기도문과 같이 예수 공동체를 대표하는 기도문을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공동체를 대표하는 기도문에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등 공동체의 신앙고백이 오롯이 담겨지기 때문에,
이는 일종의 교회 비전 선언문, 혹은 사명 선언문과 같은 정체성의 선언문을 요구한 것과 같았습니다.
만약 제자들과 무리들이 그동안 산상수훈에서 배웠던 대로 기도를 해왔다면 이 제자가 이제 와 새삼스레 기도에 대하여 질문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즉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기도에 대해 가르치셨지만, 그것이 기도문의 모습으로 암송되어 사용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다시 한번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도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암송하는 ‘기도문’이 아니라, ‘기도’ 자체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 가르쳐주시며 먼저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이건 매우 특별한 표현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모든 존재의 근원 되시는 분이시기에 신정적 아버지가 되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정작 개인적으로나 인격적으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을 때, 그것을 신성모독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하십니다.
사실 자격으로 따지자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타락하고 범죄하여 하나님과 원수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이라는 담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 됨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도 연합되어 언약 적으로 전가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악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러 오신 분이셨습니다.
그의 찢어지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가 버림받으심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가 우리의 모든 죗값을 대신 갚으시고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탕감받았습니다. 용서받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 때문에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하여서도 기도할 수 있음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만이,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었었는지를 압니다.
그래서 감히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죄 사함을 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용서받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자신이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도무지 인정하지 않습니다.
고만고만한 주변의 인간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상대적 우월감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다 자신의 도덕적 흠결이 드러날 사건이 발생하면 꽁지 빠지게 도망갑니다.
어둠은 빛을 미워하여 도망가는 법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끄심을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십자가의 피로 죄 씻음 받은 사람은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피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기도로 가지고 나아오게 됩니다.
아버지라 부르며 회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여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았기에 회개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 아버지께 죄 사함을 기도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가 받은 은혜대로,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얼마나 큰 죄를 탕감받았는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진정으로 알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용서 받고, 용서 하는 그 사랑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실제가 되고 실체를 이루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