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초대받아 들어가셨습니다.
초대받은 사람만 식사 장소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향한 구휼을 위해 바리새인들은 이런 식사 자리에 초대석 외에도 구제를 위한 테이블을 함께 준비했었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한 끼 먹기도 쉽지 않은 빈곤한 백성들은 안식일의 회당 예배 후 이런 점심시간을 기다려왔습니다.
이날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초대석이든 구제석이든 식사 자리에 특별한 음식 대신 전날 미리 구워 놓은 빵이 접대 되었습니다.
초대석과 구제석에 음식의 질은 크게 차이 나지 않았으나
내가 어느 테이블에 몇 번째 자리에 앉느냐 하는 것은
한눈에 자신이 어느 부류의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이었기에 모두에게 예민한 문제였습니다.
어느 자리에 앉을 것인지를 두고 눈치 싸움을 하는 초대자들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은 수종병자의 맞은편에 앉으셨습니다.
수종병은 물에 빠져 죽은 사람처럼 몸이 부풀어 오르는 증상을 말합니다.
당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수종병의 증상을 성적인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즉 수종병자는 정식으로 초대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수종병자와 함께 따로 구별된 구제석 자리에 앉으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런 예수님을 예의주시했습니다.
자신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예수님이 또 무슨 꿍꿍이로 저 자리에 앉으신 것인지 우려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 아닌지’를 물어보십니다.
앞선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님은,
소와 나귀에게 물을 주기 위해 놓임에서 풀어주는 일은 하면서 사람을 쉬게 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뒤틀린 율법주의를 지적하시고,
병마의 고통에서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야말로 안식일에 해야 하는 일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율법대로 하자면 그리고 신학적 논리대로 하자면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쳐주는 것이야말로 합당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보여왔던 그들의 신념대로 하자면 안식일에 병든 자를 그 매임에서 풀어주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신념대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적 근거와 논리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너뜨리거나 자신들의 생각을 증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지난 안식일 논쟁에서 드러난 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동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이 지금껏 잘못된 것을 가르쳐 왔고 잘못된 방향을 향해 살아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들 앞에서 예수님은 보란 듯이 수종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지십니다.
‘안식일에 우물에 아들이나 소가 빠졌다면 구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입니다.
만약 정말 우물에 아들이 빠졌다면, 모든 아버지는 그것이 안식일을 범하는 일이 된다고 할지라도 아들을 건져낼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라 유대교의 율법 해석서인 미쉬나에서도 이미,
안식일에 사람이 우물에 빠지면 건져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까 심정적으로도 율법적으로도 미쉬나의 해석으로도 그들의 신념대로라도, 답은 뻔히 정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물에 빠진 아들은 건져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번에도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질문이 날카로워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건져내야 한다고 대답한다면 그들이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수종병자를 구원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혀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대답은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지 않았던 것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임을 증명하는 대답이 될 것이었습니다.
침묵은 때로 많은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침묵을 통해 그들의 무능력함과 무책임함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율법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옳지 않음을, 그래서 대답할 말이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를 인정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평생 진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사는 사람인척 해왔지만
막상 진짜 진리를 대면하자, 그들은 자신들이 이뤄놓은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외면합니다.
대답을 회피합니다.
진리에 한 발짝 더 다가서기보다 뚜껑을 덮어놓고 물러섭니다.
진리를 회피, 외면, 왜곡, 은폐하려는 그들은 진리를 향한 종교의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혼인 잔치의 자리 서열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가르치십니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이란 능력도 실력도 없으면서 자리만 탐하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이력과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어 정직을 포기한 비겁한 사람들이 바로 자기를 높이는 자입니다.
반면에 자기를 낮추는 자란 낮은 척하는 겸양과 겸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낮은 자리의 위치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진리 앞에 우리의 연약함이 드러날 때 그것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달, 부귀, 명예, 권위를 모두 포기하여 정말 낮아진 사람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매일을 낮은 척하는 사람이 아니라 낮은 자의 자리에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를 높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