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 어느 부자 관리가 찾아와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습니다.
통치자 혹은 으뜸이라는 뜻의 헬라어 단어 ‘아르콘’을 사용하여 관리라고 표현하였으니,
아마도 그는 70명의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 중 한 명일 것입니다.
예수를 시험하여 물어보던 기존의 율법 교사들과는 달리 이 부자 관리는 예수님께 순수한 의도로 찾아와 질문합니다.
그는 예수를 가리켜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의 눈으로 보기에 예수는 선한 의도와 행실로 백성들을 가르치는 정말 ‘스승’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준대로 하자면 예수는 선하다고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만 선하시다고 말씀하시며 그의 평가에 문제를 제기하십니다.
이는 예수께서 스스로 선하지 않다고 실토(?)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함의 기준은 결코 사람일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
자기 소견의 보기에 옳은 그것을 선하다고 평가한다면,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비교 상대적이고 개인적인 인상비평일 뿐입니다.
개인의 소견대로 선악을 판별한다면 자기의 눈에 비친 자신이야말로 스스로 보기에 괜찮은 사람, 의롭고 선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법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영생의 조건으로 십계명을 언급하시자 그는 일찍이 그 모든 계명들을 지켜왔노라고 대답합니다.
부자 관리는 율법의 문제에 있어서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선악의 기준이 오직 하나님이시라면,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순종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신약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성경은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전7:20)

사실 십계명의 명령들을 잘 지켜 행했다는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살인하지 않았고, 간음하지 않았고, 도둑질하지 않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인생을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나 충분히 선한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눈으로 본다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선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무엇인가 하지 않는 방식의 소극적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 계명의 본질적 의도를 수행할 적극적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고 진리를 가르치는 것까지를 요구하십니다.
도둑질하지 않고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남을 도와 필요를 채우고 부요하게 하는 것까지를 요구하십니다.
살인하지 않는 것이나 미워하고 욕하지 않는 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이를 살려내는 것까지를 주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그러니까 죽어가는 이들을 살려내고 있지 않다면 살인하는 자요,
내게 있는 것으로 다른 이를 돕고 있지 않다면 도둑질하는 자요,
진리를 선포하고 진실을 전하고 있지 않다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높으신 기준에 합당하게 순종할 수 있는 이는 가히 사람 중에는 없는 것이지요.
적극적 순종은 문자적 순종 너머의 본질적 순종으로서 십계명 각각의 명령들을 관통하여 흐르는 원리로 엮여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십계명의 열 가지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가지 강령과 본질상 동일합니다.
율법의 모든 것을 요약하면 십계명이 되고,
십계명을 요약하면 두 강령이 되고,
두 강령을 요약하면 사랑이 됩니다.
예수님은 부자 관리에게 부족한 것이 한 가지가 있다고 하십니다.
곧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이 없다면 모든 계명들은 지킨 듯 보여도 그건 지킨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자 관리는 근심합니다.

예수님은 근심하는 관리에게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살아서 통과할 방법이 있을까요?
어렵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면 언젠가는 이뤄낼 수 있는 일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가기 어렵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듯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이는 결코 부자인 채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부자가 아니어야 합니다.
부자이길 포기해야 합니다.
부자란 내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버리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버린다는 것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파괴하거나 없애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있는 것이 내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내 것이 많은 사람이 부자라면 부자이길 버려야 합니다.
내 것은 한 가지도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맡아 운영하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부자가 아니라 청지기입니다.
내것이 아니기에 더욱 잘 관리해야 합니다.
내 것이 아니기에 주인의 마음대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재물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 것입니다.
아들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 날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인이길 포기해야 합니다.
주인의 자리를 버려야 합니다.
소유를 없애고, 관계를 파괴하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아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바늘귀에 낙타가 아닌 실을 꿰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부자가 아닌 주의 청지기인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부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