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말 한마디는 때로 기억 속을 휘저어 침전되어 있던 인생의 어느 한순간을 부유시키고,
마음속을 온통 뒤엉키게 만들어 버리곤 합니다.
그 말 자체는 사실과 다른 비난일 수 있습니다.
억울한 말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 자체는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 말은 매듭짓지 못한 채 묻어둔 과거로 인해
불안해하던 마음 저편을 정확하게 짚어 소환해 내는 결정적 촉매제 역할을 하기에,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시편 7편의 다윗이 마주한 상황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표제어에 등장하는 “베냐민 사람 구시”는 성경 어디에도 이름이 등장하지 않지만,
“베냐민 사람”이 “말”로 다윗을 괴롭혔다는 정황은 사무엘하 16장의 시므이를 떠올리게 합니다.
시므이는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가는 다윗에게
“너는 사울의 피를 흘린 자다, 이 재앙은 네 죄의 대가다”라고 저주하며 돌을 던졌던 사람입니다.
정황상 구시는 시므이였을 것임이 분명하지만 다윗은 그를 “시므이”라고 부르지 않고 굳이 “구시”라고 부릅니다.
다윗은 시므이와 실랑이 벌이기 위해 시편을 기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를 탓하고 그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하고픈 생각이 다윗에게는 없었습니다.
구시의 말이 무엇이었든 그 자체는 이 시의 주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이 소환시킨, 켜켜이 묻어두었던 다윗 내면의 죄책감,
그것이 이 시의 진짜 주제입니다.

“내가 이것을 행하였으면,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서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
원수가 내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소서.”
시므이의 저주와 달리, 다윗은 사울과의 관계에서만큼은 떳떳했습니다.
그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를 끝까지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떳떳함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삶을 파묘해 보면, 그는 화친의 언약 관계에 있는 사람을 배신하고 선을 악으로 갚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야는 다윗의 충실한 신하였지만, 다윗은 그의 아내를 빼앗고 그를 전쟁터의 맨 앞에 세워 죽게 했습니다.
시7:4에서 빼앗다는 뜻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하라츠’는 원래 “풀어주다”라는 뜻입니다.
단어의 용례와 문법에 맞춰 직역하면 “화친한 자에게 악으로 갚으려고 대적을 이유 없이 풀어주었다면”이 됩니다.
자기 손에 피 묻히지 않으려고, 풀어놓은 대적의 칼을 빌려 우리야를 살해한 그 장면을
다윗은 4절에서 정확하게 재현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왜 압살롬에게 쫓기고 있는지 그 원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악행이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인과응보 아래 놓여 있음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다윗의 고백은 십수 년 전의 범죄를 까마득히 잊어버린 뻔뻔한 살인자의 결백 주장이 아니라,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내어 맡김이었습니다.
“이 환란이 그날의 범죄에 대한 심판이라면, 기꺼이 받겠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십수 년간 매듭짓지 못하고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죄책감과 불안의 토로였습니다.

이 절망 한가운데서 다윗은 기도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바로 ‘셀라’입니다.
셀라는 단순한 쉼표가 아니라 반전의 전환점입니다.
“하나님, 이 환란이 그때 그 범죄에 대한 것이라면, 그 심판 받겠습니다
— 셀라 — 그러나, 주님, 막아주십시오. 돌아와 주십시오(슈브).
제 잘못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셔서 사자의 입에서 건져주십시오.”
다윗은 범죄의 기억보다 더 오래된 기억에서 소망을 길어 올립니다.
소년 시절 다윗은 목자였습니다.
사자가 양을 물어가면 따라가 사자의 입을 벌려 양을 건져내던 선한 목자였습니다.
목자는 양이 낙오를 자초했어도 양을 탓하며 사자의 입아귀에 양을 버려두지 않습니다.
양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선한 목자는,
양의 어떠한 잘못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양의 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결백에 구원의 소망을 거는 것이 아니라 ‘목자의 성품’에 기대어 용서와 구원을 간구합니다.
다윗은 스스로를 낙오된 양으로 정의하며,
저 멀리서 양을 구할 무기를 들고 달려오시는 하나님의 실루엣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실루엣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의 형체를 하고 계셨습니다.
다윗이 대적의 칼을 빌려 신하를 죽인 왕이었다면,
돌아오시는 이 목자는 양을 살리려고 자기 생명을 내어주시는 왕이십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인생을 맡깁니다.

시편 7편은 “나의 의를 따라 심판하소서”로 시작하여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로 끝납니다.
내가 결백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나를 위해, 잃어버린 양을 찾아 길을 되돌아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구시의 말처럼 과거의 죄책감을 흔드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네가 그러고도 성도냐, 네가 그러고도 목사냐”라는 정죄의 음성이 들려올 때,
그때 우리가 할 일은 숨기고 싶던 그 마음을 고집하여 죄악을 부정하며 억지 결백을 주장하는 것도,
자책의 절망 속으로 끌려 내려가는 것도 아니어야 합니다.
고개를 들고 잃은 양을 찾기 위해 뒤돌아오시는 목자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의 손에 인생을 맡겨야 합니다.
신앙은 나의 결백을 증명하는 경주가 아니라,
나의 불완전함을 덮으시는 하나님의 의를 신뢰하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닥치는 고난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증거가 아니라,
큰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나 혼자 지게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현장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