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레디’라고 불리는 경건한 유대인들의 경우, 안식일에는 엘리베이터 버튼도 누르지 않습니다.
버튼을 누르면 불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들에겐 일에 해당합니다.
안식일엔 바늘조차 들고 다닐 수 없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늘보다 훨씬 무거운 소파는 안식일에도 밀어서 옮길 수 있습니다.
안식일 준수와 관련한 이런 독특한 관습들은 무엇을 ‘일’로 여길 것인지 기준을 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했습니다.
안식일에 창조를 멈추신 하나님처럼 우리도 창조와 관련한 일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성막을 만드는 일을 창조와 가장 닮은 일로 여기고,
성막을 만드는 행위를 연상시키는 모든 행동들을 ‘일’로 규정해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금지 행위로 묶어두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이런 방식의 순종으로 안식일을 지키길 원하고 계신 것일까요?
하지만 놀랍게도, 본문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명령은 “지키라”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20장 8절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동사가 하나뿐입니다.
“자코르”, 즉 ‘기억하라’입니다.
애초에 지키라는 명령을 담은 동사는 원문에 없습니다.
직역하면, “거룩하기 위해 그 안식일을 기억하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억하라는 것일까요?
정관사가 붙은 바로 ‘그 안식일’, 즉 어떤 특정한 안식일을 가리켜 그날을 기억하라고 명령하고 계신 겁니다.
‘그 안식일’이런 어떤 날을 가리키는 것인지 11절이 답합니다.
하나님이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던 바로 그 안식일입니다.
즉 하나님이 쉬셨던 첫 번째 안식일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하나님은 왜 쉬셨을까요?
창조에 몰두하시느라 지치셨던 것일까?!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피로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을 멈추신 진짜 이유는, 더 이상 하실 일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즉 창조가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나리자라는 작품에 붓질을 더하는 것은 완성이 아니라 훼손인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는 보시기에 좋았다는 만족감 속에 완벽한 완성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멈추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은 대체 무엇을 위해 창조 사역을 완성하신 것일까요?
혹시 창조의 목적이 사람이었을까요? 사람을 위해서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것일까?!
아닙니다. 창조 기사의 피날레는 사람의 등장이 아니라 안식의 등장으로 이루어집니다.
안식이야 말로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복되게 하셨습니다.
대체 왜 하나님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세상을 채우신 6일간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시지 않고 멈추신 날을 더 거룩하고 복되다고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6일간의 창조 사역에서 하나님은 늘 자신 밖의 무언가를 향해 행동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에 이르러, 비로소 하나님은 자신 밖의 대상을 향한 일을 멈추셨습니다.
하지만 이때,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멈추셨다지만 사실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하신 것은 아닙니다.
창조세계를 보존하시고 통치하시고 운영하시는 섭리하심은 한순간도 멈추신 적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한 일들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날 멈춘 것은 오직 다른 대상을 향한, 창조의 일뿐이었습니다.
이로보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행위가 다른 대상들을 향하는 것이 아닌,
마침내 자신의 영광만을 향하는 것으로 전환된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창조의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날.
그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내가 쉬는 날이 아닙니다.
내 에너지를 충전하는 날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쉬신 이유를 기억하며,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로만 향하는 일들로 채워져야 합니다.
할례가 하나님의 구원을 몸에 새겨 기억하는 것이었다면,
안식일은 우리 삶의 시간 위에 새겨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를 위해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를 위해 하나님이 맡기신 일들에 6일을 충성하며,
주를 위해 직접적으로 주를 향한 일들 만으로 안식일을 채워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가 주를 위한 삶이지만, 방향이 다릅니다.
주를 위해 주께 행하는 일들과, 주를 위해 나를 향한 일들을 하는 것은 구별이 있어야 합니다.
11절에서 “쉬었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누아흐”는 원래 “도달하다, 머무르다”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방주가 아라랏 산에 안착했을 때 사용된 동사가 바로 ‘누아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에 다다르는 것, 그래서 그 창조의 목적에 머무르는 것, 그것이 쉼입니다.
하나님의 쉼에 다다라, 그 쉼에 참여하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죄인은 이 쉼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픈 사람이 쉴 수 없듯이, 물에 빠진 사람이 쉴 수 없듯이,
죄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진정한 쉼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안식일에 쉬지 않고 일하시며 병든 자를 고치시고,
궁극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건져내셨습니다.
창세기 5장 29절, 라멕이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 지으며 말했습니다.
“이 아이가 우리를 쉬게 하리라” 그 예언을 궁극적으로 성취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목적인 안식을 비로소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날은 안식 후 첫날 새벽, 곧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었습니다.
이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진정한 쉼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한다면,
진정한 쉼은 주일 하루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삶 전체, 우리의 매일에 다다라
우리 삶을 안식으로, 천국으로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