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우리의 양심을 심각하게 자극하는 계명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들으면 대개 안심합니다.
지금껏 잘 지켜왔고 또 앞으로도 잘 지킬 자신이 있는 계명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계명은 그 계명 앞에 선 자들에게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깊고 엄중한 내용을 요구합니다.
사실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죽이지 말라는 명령은 아닙니다.
이 계명은 오직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먹기 위한 음식으로써 사람에게 동물을 허락하셨습니다.
심지어 타락하여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는 아담을 위해,
하나님은 직접 살생하셔서 벗긴 가죽으로 옷을 지어 아담의 수치를 가려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 중에 오직 인간만이 죽여서는 안 되는 독특한 존귀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모든 피조물들보다 존귀한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대리인으로서, 하나님의 통치와 사랑을 피조 세계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창조 목적입니다.
그렇기에 사람의 생명을 헤쳐서는 안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대리자,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의 의미는 절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지 말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6계명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무엇 때문이든지, 언제나 죽임 당하지 않고 지켜져야 한다는 명령인 것일까요?!
그러나 성경을 보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명령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9장에서는 살인자, 곧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하십니다.
만약 6계명의 명령이 모든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의미로 하신 명령이라면,
‘어떤 이들은 반드시 죽이라’는 명령과 충돌하는 명령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은 어떤 이유에서든 모든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할 때 사용된 히브리어 ‘라차흐’는 단순히 죽이는 행위를 묘사하는 때에 사용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보다 특정 상황에 한정하여 사용하는 좁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라차흐’는 죽이는 이의 의도성이나 심리 상태가 아닌 죽임 당하는 이의 온전한 상태를 전제로 하는 단어입니다.
즉 정당하고 의로운 이가 부당하고 불의하게 죽임 당한 경우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즉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은 ‘까닭 없이 부당하게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반대로 말해, ‘부당하게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이 소극적 금지 명령을 적극적 시행 명령으로 바꾸어보면,
‘합법적인 이유가 명확한 사람들은 죽이라’는 명령이 함께 요구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즉 율법의 다른 부분에서, 직간접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여 ‘반드시 죽여야 할 어떤 이들’이 된 자들을 향한 명령은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명하신 명령과 충돌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계명의 적극적 순종은 하나님의 형상을 직간접적으로 훼손한 이들의 처형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지키지 못하고 훼손한 자들은,
‘반드시 죽이라’는 율법의 합법적인 명령에 따라, 반드시 처형해야 하는 것까지가 6계명의 올바른 시행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 명령의 적극적 시행 앞에 살아남을 자가 사람 중에는 없을 것이란 점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어내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실패로부터 지금까지, 사람 중엔 하나님의 선하심과 완전하신 영광을 온전하게 보여줄 수 있는 이가 없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바라보면 더 이상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한 자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형제 보러 바보라고 하는 자마다 이미 살인한 자’라고 하셨던 것은
미움, 시기, 다툼도 살인이라고 살인의 개념을 새롭게 확장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켜내고 드러낸 자가 없다는 것을 폭로하신 것일 뿐입니다.
기준이 새로워지고 더 높아진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살인의 기준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형상이 기준이기에 사람이 닿을 수 없을 만큼 높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계명이 시행될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실패한 인생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사망의 형벌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율법을 온전히 시행하실 때, 차디찬 문자적 실행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셨습니다.
주님은 십계명에 사랑을 더 하셨습니다.
소극적이고 적극적인 율법의 요구 모두에 순종하시면서, 사랑으로써 더욱 앞서 행하여 능동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이는 주께서 그렇게 하셔야 할 아무 의무나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행하신 자발적 희생이었습니다.
‘까닭 없이 죽이지 말라’는 소극적 명령과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한 불의한 자들을 처형하라’는 적극적 명령에,
그리스도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더해지자,
십계명의 죽이지 말라는 명령과 율법의 죽이라는 명령은 ‘사람을 살리라’는 존귀한 열망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죽어야 할 자들을 살리는 데까지 나아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의 순종이었습니다.
이제 이 사랑의 은총을 아는 자들마다 예수님이 성취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입게 됩니다.
그의 사랑이 우리의 것이 되고, 그의 생명이 우리의 것이 되고, 그의 아들 됨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예수 믿으세요.
이제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 아들의 그 사랑을 보게 될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이름은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