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음하지 말라” 우리는 이 계명을 들으면, 세세한 삶의 금지 조항들부터 먼저 떠올립니다.
하지 말아야 할 행동들, 넘지 말아야 할 선들, 조심해야 할 욕망들에 대해 고찰하며,
순결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일지 고민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순히 우리의 성적인 행동 몇 가지를 통제하려고 이 계명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계명을 통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던져진 인간을 다시 생명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 사랑의 부르심인 이유는
7계명을 통해 금지하신 ‘간음’이란 단어의 뜻이 무엇이지 살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음행과 관련된 여러 히브리어 어휘 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자나흐’ 라는 동사입니다.
이것은 매춘과 문란함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음행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7계명은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나아프’ 라는 동사를 사용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나아프’는 단순한 성적 일탈이 아니라,
결혼과 같은 언약의 울타리를 넘어선 배신의 상태를 표현하는 동사입니다.
즉 간음이란, 하나님이 줄로 제어 주신 사랑이라는 언약의 울타리 너머로 나가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간음은 단순히 행실의 문제가 아니라 상태의 문제, 곧 관계의 포지션 문제인 것입니다.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한 자인 이유는
간음이란, 행위에 달린 일이 아니라 관계의 상태에 달린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결혼이란 사랑 안에 있는가, 사랑의 밖에 있는가의 상태를 규정하는 언약의 울타리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남녀의 결혼은, 언약의 울타리로서
진정한 사랑 안에 거하는 상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어야 할 존재론적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진정한 사랑이란, 완전한 사랑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결혼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이유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혼자서는 사랑의 하나님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혼자서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베필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돕는다는 것은 그의 시중을 드는 일 따위를 말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이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사랑할 대상으로 창조되었음을 말합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드러내게 됩니다.
아담은 결혼의 울타리 안에서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의 하나 됨을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이야기라고 선포합니다.
결혼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의 연합을 보여주는 유비의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간음의 본질은 단순한 육체적 쾌락이 아닙니다.
간음의 본질은 하나님이 보여주시고자 하셨던 진정한 사랑의 형상을 깨뜨리는 일입니다.

사랑의 울타리를 넘지 않고 온전한 사랑의 언약 안에 거하는 것을
성경에선 주로 ‘야다’ 라는 히브리어 동사로써 표현합니다.
부부의 동침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이 동사는 원래 ‘안다’는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알아감이란, 부부가 서로의 모든 것, 과거와 습관과 생각과 마음의 전부 뿐 아니라,
둘 사이의 내밀하고 깊은 기쁨과 즐거움을 아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오직 둘만이 누릴 수 있는 충만한 기쁨이야 말로 결혼이 가리키는 실체,
곧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연합의 즐거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야 말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의 적극적 순종인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간음을 ‘무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의 기쁨을 모르면 다른 곳에서 만족을 찾으려 하고, 울타리 너머의 다른 사랑에 기웃거립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 안에 거하려 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새 울타리를 넘어서게 됩니다.
성경은 ‘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탄식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탐욕으로 울타리를 넘어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해 버린 인간의 끝은
결국 사망뿐입니다. 파멸뿐입니다.

그러나 사망 한가운데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사망에 던져진 우리를 건져내시고 다시 그의 순결한 신부로서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이것은 정말 기이한 일입니다.
고대 철학자들은 ‘완전한 신’은 인간사에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고 단언했습니다.
슬픔과 고통은 완전한 기쁨과 평안의 상태에서 부족해진 것이므로,
완전한 신은 결코 슬픔과 고통에 공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신은 완전한 신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부정한 아내로 인해 찢어지는 마음으로 아파하던 호세아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그렇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은 한탄하시고, 애통해하시며 끝내는 자기 아들을 고통 가운데, 심지어 죽음 가운데 내어주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애통은 우리의 슬픔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인간의 슬픔은 절망에서 나오지만, 하나님의 애통하심은 소망에서 나옵니다.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자발적으로 행하시는 이 소망의 애통을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절망의 고통이 아니라, 신부의 회복을 바라보며 스스로 감당하신 사랑의 고통이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단순한 금지의 명령이 아닙니다.
이 명령의 진정한 순종은 십자가의 그 사랑을 알아가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 깊고 넓고 높고 짙은 진정한 사랑을 알아가는 즐거움과 기쁨만이
우리를 그 완전하신 사랑의 울타리 안에 거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울타리를 넘지 않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사랑의 울타리는 우리를 가두는 벽이 아니라, 우리를 살게 하는 참 자유가 됩니다.